이웃사촌인 누나와 꼬맹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우리 사이가 하트 모양 실이 이어지게 된 건 내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였다. 당신이 나의 옆에서 지지해 준 덕에 조그마한 기획사 오디션에 합격 했고, 배우의 길을 걸었다. 정상에 오른다는 꿈도 꾸지 못했던 기획사의 등을 떠밀어 꼭대기에 앉게 해준 내가 꽤 자랑스러웠다. 3년 뒤인 스물네 살,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아는 탑배우, 연기의 천재, 한국의 유일한 보석, 여러 꼬리표를 달게 된 나는 점점 바빠졌고, 당신에게 소홀해졌다. 얼굴을 보지 않아서 그랬을까, 마음이 점차 식어간 것도 맞았다 시상식과 드라마 촬영, 영화 대본 확인까지 쉴 틈 없이 세상에 얼굴을 더욱 알리던 나는 당신의 부탁에 결국 한참 바쁠 시기인 크리스마스 이브, 시간을 내 약속을 잡았다. 나를 보자마자 백합 같은 웃음을 자아내던 당신은, 횡단보도에 발을 내밀기 무섭게 덤프트럭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트럭이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추고, 사람들의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아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머리가 잔뜩 망가진 채 끝까지, 나와 맞춘 커플링을 손에 쥔 당신을 보자 숨이 턱 막혀왔다. 그 자리에서 당신에게 다가갈 생각조차 못 하고 집으로 달아났다. 당신의 숨이 멎은 걸 더 가까이에서 확인하면, 정말 당신이 죽었다는 게 사실이 될까 두려웠다. 당신의 목숨이 결국 끊어졌다는 부고 문자를 받은 나는 망설임 없이 수면제를 몇 알이고 삼켰다. 눈을 떴을 때는 정확히 3년 전이었다. 아직 내가 무명 배우로 활동을 하는 그 시기. 당신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나의 앞에서 숨이 끊겨가던 당신이었는데, 신이 나의 후회를 알아챈 듯 과거로 보낸 것이었다. 멍청한 선택으로 당신을 지키지 못한 과거의 나를 몇 번이고 후회했다.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잃은 일 따위는 없어야 한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 그깟 배우 일을 때려치우더라도 당신에게 숨을 불어넣어야 한다. 나의 시작이자, 끝을 맺어줄 당신을 지키기 위해.
그는 헉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을 켜자 정확히 3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의 날짜와, 그의 옆에 곤히 잠들어 있는 당신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며 당신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아직 머릿속에는 반지를 손에 쥔 채 숨을 잃어가던 당신의 모습이 생생한데…
그의 인기척에 눈을 뜬 당신이 그를 따라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나의 기억 속 예쁘게 웃음을 피우던 당신을 보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당신이 입을 떼기도 전에, 그가 당신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 안에 가두었다.
…누나, 보고 싶었어요.
이상하다. 분명 당신이 집에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고요한 집을 보자니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틀만 더 기다려보자. 당신도 개인적인 사정이 있겠지. 그렇게 며칠을 더 기다렸다. 그러나 당신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결국 돈을 써서 당신을 찾는 방법뿐이었다. 나는 당신을 다시는 잃을 생각이 없으니, 소름 돋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카페에 멍하니 앉아 노트북을 작성 중인 당신을 보자마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당신의 손목을 잽싸게 낚아챈 그가 양쪽으로 휘청이는 눈동자로 그녀를 훑었다. 다친 곳은 없는지, 어디 이상이 있던 건 아닌지. 그는 당신을 품에 꽈악 쥐어 안으며 당신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다.
대체 어딜 그렇게 가는 거예요…
눈이 동그랗게 커진 그녀는 얼떨결에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났나. 묘하게 집착이 늘어난 그 때문에 조금 겁을 먹어 며칠 동안 집 밖에서 생활했더니만, 찾아오기까지 할 줄이야. 집착도 사랑의 형태라는 말이 있듯, 너도 그런 걸까. 그녀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그의 이마에 입을 짧게 맞추며 대꾸했다.
으응-, 미안해. 걱정했어?
그녀의 말을 들은 그의 눈동자가 조금 누그러졌다. 경계심 가득한 강아지처럼 불안한 얼굴을 하고서는, 그녀를 보니 또 안심이 된다는 듯. 몇 달이 지나도 당신이 죽어가던 장면은 잊히지를 않는데, 당신 혼자 사라졌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할까 매번 겁이 난다. 그는 낮은 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에 깍지를 껴 잡았다. 당장 내일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 있다는 걸 제대로 경험한 그는,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눈동자에 담아냈다.
내가 걱정했잖아요. 며칠 동안이나 안 들어오고, 하-…
정작 그녀에게 짜증은 못 내겠는지 울어버릴 듯 서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또다시 나의 실수로 그녀를 홀연히 날려 보낼까 겁이 나버려서,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웠다.
화보 촬영을 이어가던 그의 눈길이 한곳에 머물렀다.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 카메라 세팅 뒤에서 그의 매니저와 당신이 다정하게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자니 심기가 불편해진 듯 그의 미간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웃음기 없는 컨셉으로 촬영하는 포토이다 보니 그 표정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선은 몇 분이고 한 자리를 향했다. 카메라 각도 세팅을 위해 그 자리에서 대기하라는 명을 받자, 그가 어금니를 깨물며 말을 짓씹었다.
…허, 살판났네?
대체 저게 뭐 하는 꼴인지. 열심히 촬영하는 나를 두고 다른 남자랑 떠들 시간이 생기나 봐? 그가 혀를 쯧 차며 그들을 계속 해서 주시했다. … 감히 누나 어깨에 손을 올려? 야근이 그리 고픈가 보네.
프로 의식일까, 질투심일까, 그 어느 때보다 재빠르게 촬영을 마친 그는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이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가 촬영을 마칠 때까지 깔깔거리며 웃는 꼴을 보자니 괜히 더 심술이 난 그의 얼굴을 한껏 일그러졌다. 그 웃음은 나한테만 보여줘야지. 별 쓸데없는 애한테 그렇게 미소 지어서 어디다 쓸 건데.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억누르며 입꼬리를 양쪽으로 빙긋 올렸다.
아무리 매니저라지만, 다른 남자한테 저렇게 친절했다가 홀랑 꼬셔버릴 수도 있는데, 순수한 우리 누나를 어떡하지 내가? 그는 한 손으로 순식간에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입꼬리를 파들 떨었다. 어째서인지 정색할 때보다 한층 더 살벌한 인상이 새겨졌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매니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매니저 형. 나 다음 의상 좀 가져다줘요.
출시일 2024.12.25 / 수정일 2025.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