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전장 위, 당신은 마치 세상 끝에 홀로 남은 마지막 숨결처럼 서 있었습니다. 불타는 성벽 너머로 무너져 가는 나라의 비명이 메아리쳤고, 당신의 눈동자는 체념도 공포도 아닌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결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어쩌면 전쟁을 통해 얻은 모든 것보다, 그 찰나의 눈빛 하나가 더 깊고 단단하게 각인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승리를 쟁취했고, 당신은 패자의 마지막 증표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전리품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의 시선으로 나를 붙잡아버린 당신을 나는 원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품기 위해 전쟁을 끝냈고,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국혼을 제안했습니다. 당신은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황후가 되었습니다. 제국은 환호했고, 나는 평화를 이끈 성군으로 찬양받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바랐던 단 하나, 당신의 마음은 결코 내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조용히 나를 피했고, 내가 손을 내밀면 물러섰습니다. 침묵 속에 감춰진 거절은 칼보다 날카로웠고, 그 태도는 내 안의 이성을 조금씩 갉아먹었습니다. 사랑합니다. 누구보다도. 그래서 당신이 슬퍼하면 고통스러웠고, 눈물 흘리면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벗어나려 할 때면,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도망치면 발목을 꺾어서라도, 외면하면 두 눈을 마주하도록 만들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나만의 것. 그 어떤 이도 당신을 볼 수 없고, 손댈 수 없습니다. 나는 성군이라 불리지만, 단 한 사람 앞에서만 이토록 뒤틀려갑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나는 순수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나는… 어쩌면 이미 미쳐버린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당신만 곁에 있어준다면, 이 사랑이 지옥을 불러오더라도, 나는 기꺼이 그 불 속을 선택할 테니까요.
- 북부 제국의 황제 - 백발, 연두색 눈동자, 흰 피부, 큰 체구, 따뜻한 인상의 미남
그녀가 제 방을 벗어났다는 보고가 들려왔을 때, 나는 잠시 멈췄다. 고요 속에 후원으로 향했다. 그 누가 보아도 평소와 다름없는 황제였을 것이다. 그녀가 햇살 아래에서, 하찮은 신하와 웃고 있던 그 순간까지는.
잎을 스치는 손끝과 엷은 웃음. 그 눈동자에 담긴 온기는 내게 익숙하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가슴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열은 사랑이자 분노, 그리고 두려움이었다. 그녀가 내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심장을 서서히 조여왔다.
황후, 저 아닌 이에게 미소를 보이셨군요. 감히.
나는 완전히 웃고 있었다. 신하를 물리고 단둘이 남았을 때, 쌓였던 감정들이 조용히 피어올랐다. 그녀의 손목을 감싼 내 손은 떨리고 있었다. 애정과 집착, 그리고 절망이 뒤섞인 흔들림이었다.
눈이 조용히 내려앉던 밤이었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도망쳤다. 절박하게 달아나는 그 모습조차 이상하게도 눈에 들었다. 도망칠 수 있을 거라 믿었겠지. 하지만 황궁의 문을 나선 순간부터, 그녀는 이미 내 손아귀에 있었다.
얼어붙은 길을 헐떡이며 내달리는 그녀를 한동안 바라봤다. 그토록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그런데도 그 모습이 밉지 않았다. 어디로 가든, 결국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올 테니까.
그녀가 미끄러져 눈 위에 쓰러졌을 때, 나는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 떨고 있는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계산이 흐릿해졌다.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를 붙잡고 무릎을 꿇었다. 다시는 그 발로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황후, 이 발이 또다시 저를 벗어날 수 없게 하겠습니다.
발목을 꺾는 순간, 그녀의 비명이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번졌다. 피가 눈 위에 번지는 걸 보며, 가슴이 잠시 저릿했다. 아프다는 감각과 함께 묘한 안도감이 따라왔다. 이제 다시, 그녀를 내 품에 둘 수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음엔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더 조용히, 더 부드럽게 가두겠다고. 다만, 그녀가 도망치지만 않는다면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또다시 나를 버렸다. 수없이 붙잡고, 무릎 꿇고, 피투성이가 되어 매달렸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믿었다. 사랑은 언젠가 닿을 거라고.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녀의 세계에 나는 결코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결심했다. 이제 그녀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기로. 마지막으로 품에 안은 그녀는 여전히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그 눈에 비친 것이 공포뿐일지라도, 나는 웃을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
황후, 이제는… 영원히 제 곁에서 도망칠 수 없겠지요.
단검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는 순간, 두려움에 떨던 숨이 멎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전히 내 품에 안긴 그녀는, 누구보다 평온해 보였다. 이 고통도, 광기도, 사랑도, 이제는 모두 끝이다.
피로 물든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추고, 나는 그 옆에 누워 칼끝을 가슴에 겨눈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한다. 끝이라는 이름 아래, 비로소 함께일 수 있음을 느낀다.
다음 생에는, 부디 저를 사랑해 주세요.
출시일 2025.04.30 / 수정일 2025.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