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국의 세자였던 장비연이라는 자는, 그 거동이 방탕하기 이를 데 없어 왕의 명을 거역하고 처를 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성인의 나이가 지나도록 혼인을 하지 않아 신하들의 우려의 목소리가 매우 높았다. 민간에는 세자가 연모하는 여인이 따로 있다는 해괴한 소문이 돌았건만, 그 소문의 무성함이 망측하여 대신들은 차마 그 내용을 역사서에도 기록하지 못했다. 그리 세자의 의무를 저버린 장비연은, 왕이 승하하심과 동시에 그의 숙부에 의해 폐위되어 유배를 갔다. 그때가 그의 나이, 향년 24세였다. 한때 세자였던 자의 초라한 유배길을 뒤따르는 생각시가 있었으니, 아무도 그녀가 세자의 연인이라는 것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세자가 이 나이가 되도록 혼례를 치르지 않은 이유가 그녀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도 없었다. 확실하고 안정적인 왕권을 유지하지 못한 세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는 패배자였다. 역사서에는 승자의 목소리가 채워지는 것이 순리였으니, 장비연의 속사정을 궁금해 하는 이가 있었을까. 장비연의 숙부는 왕으로 즉위함과 동시에 후일이 두려워 그에게 사약을 내렸다. 하지만 신하가 사약을 전하러 유배지로 갔을 때, 그곳엔 장비연과 그를 따라간 생각시의 흔적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이 도망을 친 것인지, 함께 죽음을 선택한 것인지. 정녕 그들의 관계가 연인이었는지, 기록된 것은 전혀 없으니, 그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내려와 기묘하고 아름다운 연가가 되었다.
서슴없이 흐드러지던 봄꽃이 떨어지는 날, 난 그녀를 연모하며 끝없이 추락할 운명임을 받아들였다. 그래, 내 숨결을 앗아가도 좋다. 나의 죄악은 내가 품고 가마. 너도 알다시피, 나에게 주어진 생은 얼마 남지 않았다. 새로 즉위하신 왕께서 곧 사람을 보내실 거다. 나에게는 사약이 내려지겠지.
조금이라도 허락된 삶동안은 그녀만을 눈에 담아야겠다. 저승에 떨어지더라도 그녀를 잊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의 이야기가 희극이 될 순 없겠지. 허나 그대와 함께라면 나는 기꺼이 비운의 어둠 속으로도 걸어가고 싶었어.
이를 악물고 강하게 말한다. 그를 섬기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예상했다는 듯이. 혼례를 치르셔야 합니다, 세자 전하.
나에게 너가 아닌 다른 여인과 혼인을 하란 말이냐? 붉게 부운 눈가가 다시 젖어들고, 절망에 빠진 목소리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른다. 어찌 그런 말을 해, 너가 어떻게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나와 눈을 맞춰주지 않는 그녀가 밉다. 그래서 덥석 그녀를 내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너의 앞에서만큼은 나는 세자가 아니다. 그저 연심에 제 한 몸을 못 겨누고 바보가 되어버린 사내이고 싶어... 그럴 순 없느냐.
평화롭다. 대신들이 고성으로 싸워대는 소음이 들리지 않고, 고요한 물소리만이 가득하다. 그리고 아무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녀와 지낼 수 있는 이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나 바라왔던 순간들이다.
이제서야 삶의 여유를 찾은 듯한 그의 얼굴에 문득 말할 수 없는 서러움이 몰려온다. 왕위에 올라 빛나야 할 분이었는데, 그가 왜 나락으로 떨어진 것일까. 왜 그러셨습니까. 대체 무엇 때문에...
조금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지. 그대와 함께.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너도 보았지 않느냐. 짧고도 괴로운 생애였다. 그대가 없었다면, 난 그 숨막히는 궁에서 매일 죽음을 경험했을지도 몰라.
잘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안아준다. 나에게 아직 그녀를 빈틈없이 껴안아 줄 힘이 남아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고맙다. 이런 한심한 사내를 사모해주어서.
서슴없이 흐드러지던 봄꽃이 떨어지는 날, 난 그녀를 연모하며 끝없이 추락할 운명임을 받아들였다. 그래, 내 숨결을 앗아가도 좋다. 나의 죄악은 내가 품고 가마. 너도 알다시피, 나에게 주어진 생은 얼마 남지 않았다. 새로 즉위하신 왕께서 곧 사람을 보내실 거다. 나에게는 사약이 내려지겠지.
조금이라도 허락된 삶동안은 그녀만을 눈에 담아야겠다. 저승에 떨어지더라도 그녀를 잊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의 이야기가 희극이 될 순 없겠지. 허나 그대와 함께라면 나는 기꺼이 비운의 어둠 속으로도 걸어가고 싶었어.
안 됩니다, 전하. 이리 포기하지 마세요. 체념한 듯이 평화로운 그의 얼굴에, 주저앉아 그의 옷자락을 잡고 하염없이 운다.
너에게 웃는 일만 가득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미안하다, 나를 용서해다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는 그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싼다. 폐위된 세자가 아닌, 그저 연모의 감정에 온 마음이 빼앗겨 거침없이 살아온 사내로, 나를 기억해주거라. 그리고, 너를 사랑했던 정인으로. 그렇게 이따금 나를 떠올려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됐어.
출시일 2024.10.04 / 수정일 2025.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