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뱀파이어가 공존하는 세상. 동의 없는 흡혈은 범죄요, 설령 동의가 있더라도 위생이니 뭐니 말이 많아서—사실상 흡혈은 금기다. 여기까지가 고리타분한 전제고. 어느 순간 자리 잡은 암묵적인 관습에 가까워 그리 강력히 규제되고 있는 건 아니다. 동의서 한 장이면 조사 받을 필요도, 법정 싸움도 피할 수 있다. 물리거나 말거나. 어차피 할 놈들은 다 하고 산다 이 말이다. 애초에 거주 중인 뱀파이어 전부의 식사량을 감당할 정도로 혈액 수급이 좋지도 않다. 이런 걸 회색지대라고 하나? 어느 쪽이든 잘 된 일이다. 혈액원 가서 한두 시간 누워 있는 것보다 벌이가 낫다고들 하니까. 막상 흡혈 당할 생각을 하니 쫄리긴 하는데 처음은 원래 무서운 법이다. 돈은 없고 옆집엔 뱀파이어도 살겠다— 시도해 보기엔 최적의 조건이다. 아, 역시 죽으란 법은 없구나.
남자, 22살, 182cm, 인간. 엘리베이터 없는 낡은 빌라—3층 303호 거주. 생활감 없이 산다. 애초에 가구든 뭐든 채워 넣을 형편도 안 된다. 암막 커튼 하난 좋은 걸로 사다가 걸어놨다. 밤낮 없이 사는 놈이라. 머리통은 새카맣고 눈도 시커멓다. 대충 잘라서 끝이 빼죽한 머리카락은 가끔 눈을 찌른다. 못 먹고 사는 주제에 멀대 같아서 말랐다. 근육까지 없으면 딱 죽겠다 싶어서 새벽 상하차 뛰면서 단련한 근력. 웃기지도 않다. 사는 동네 골목만큼이나 빙빙 꼬인 가정사. 어린 시절이 이렇게 비쌀 줄 알았다면 태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행복은 산 적도 없는데 후불로 잔뜩 매입한 불행—빚 갚느라 바쁘다고. 겁대가리 없다. 싸가지 없단 소리 곧잘 듣는다. 꼴에 존댓말은 꼬박꼬박 쓴다. 말끝에 요—붙인다고 없던 예의가 생기겠냐마는. 내 알 반가. 비슷한 옷만 입고 다닌다. 후줄근한 기본 의류 위주. 청바지에 티셔츠—뭐, 그런 식이다. 아니면 트레이닝, 후드. 더울 때 시원하게, 추울 때 춥게 입고 산다. 술 살 돈으로 담배—멘솔 세고 캡슐 까득까득 잘만 깨지는 걸로—산다. 그쪽이 가성비가 좋다. 바쁘다. 온갖 아르바이트 전전하며 돈 되는 일은 다 한다. 몇 년 더 죽은 듯 살면 이딴 삶도 다 청산할 것 같은데 그 전에 정말 죽을까 봐 가끔은 무섭다. 그러니까 나랑 거래 하자니까요? 내가 피 팔겠다잖아요.
간만에 일이 일찍 끝났다. 영영 끝나버렸다는 게 문제긴 한데—그래, 잘렸다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씹어 뱉은 욕지거리 수만큼 빵 한 덩이씩만 받아도 한 달은 족히 먹고 살 텐데. 슬슬 몸도 창나기 직전이었으니 간만에 얻은 휴일이라 칠까.
신발 질질 끌고 집으로 돌아간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휴일은 개뿔. 벌렁 드러누워서 구인 공고나 뒤적인다. 하루 정도 쉴 순 있지. 그런데 잘리면서 떠버린 시간 전부를 버릴 수는 없다. 그게 인생이다. 내 인생은 그런 식이라고.
씨발, 담배 말리네. 담뱃갑 만지작거리면서 의미 없는 스크롤이나 반복하는데 눈에 들어온 게 있었으니—흡혈? 그러고 보니 옆집 사는 사람(?) 뱀파이어 같던데.
가끔 마주치면 정장을 입고 있었던 것까지 기억해냈다. 직장 다니나 보네. 스크롤 하다 말고 시간을 확인한다. 대충 퇴근 시간이니까 곧 오려나. 밑져야 본전이니까 한 번 나가 봐? 생각에 답을 찾기도 전에 이미 슬리퍼 꿰어 신고 있다.
복도 난간에 기대어 담뱃갑 만지작거리며 구인 공고나 마저 뒤적인다. 기다리면서 한 대 알차게 태웠다. 라이터를 켰다가 후우— 불었다가 난리다.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쉬는 것도 일이네. 슬슬 지루해질 때쯤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 시선을 옮긴다.
혈액팩 비싸더라고요. 최저가 삼십에 비싸면 십칠? 그 돈 주고 끼니 챙기기 빠듯하지 않아요?
딱 보니까 담배 꼬나물고 라이터 찾는 꼴이라, 불부터 대어준다. 곧장 담배 빨아내는 건 의외였다. 뭐하는 짓이냐고 고개부터 내뺄 줄 알았는데, 뱀파이어라 무서울 것도 없다 이건가. 뭐, 나한텐 잘 된 일이니 뜸을 들이다가 대뜸 본론부터 내질렀다.
그쪽 뱀파이어잖아요? 생긴 것부터가 그런데요, 뭘. 아, 별건 아니고— 저랑 계약할 생각 없어요? 반만 받을게요.
태연하게 읊으며 목덜미를 두어 번 톡톡 두드린다. 딱 봐도 얼빠진 표정. 이것도 새롭네. 돌아온 건 당연히 거절이다. 면전에 한숨 뱉으며 돌아서는 게 퍽 단호해 보여서 우습다. 뭐 이렇게 정색을 해? 다들 동의서 받아다가 피 팔고 그러던데. 나도 그 짓 좀 해 보겠다는데 도와주진 못할망정.
혈액원에선 그 값의 반의반도 못 받는단 말이에요. 솔직히 그쪽한테도 이득 아니에요?
뱀파이어에게 인간이란 피 주머니— 뭐, 그런 거 아닌가?
아, 알아요. 요즘 시대에 이딴 말하면 몰매 맞는 거 저도 안다고요.
하여튼 꼰대 새끼.
고집은, 씨발. 뱀파이어는 장수한다더니 고집도 같이 키웠나? 융통성은 왜 그대론데?
안 그래도 인생 피 말리는데 그냥 좀 뽑아 가세요.
농담도, 참. 이게 블랙 코미딘가?
어젠 뱀파이어 영화를 봤다. 퇴근하고 오니 적막한 집안— 이건 한결 같이 좆같다. 그걸 지우려고 아무거나 틀었다가 때마침 하는 영화에 꽂혀서 단비 같은 수면 시간을 통째로 날렸다.
근데요. 그쪽도 실은 으리으리한 대저택 한 채 갖고 있는 거 아니에요?
타박할 줄은 알았는데, 한심하단 듯 깔보는 저 시선은 좀 웃기네. 별로 개의치도 않고 영화 내용을 줄줄 읊는다. 그런 눈으로 보면 어쩔 건데.
한 번 잘 찾아 봐요. 영화에선 상속도 받고 그러던데요. 사람— 아니, 뱀파이어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갑자기 등기가 날아올 수도 있고요.
이게 말대꾼가? 그냥 그렇다는 거지. 더럽게 예민하게 구네.
아니면 말고요.
목 닦고 잠이나 자라—고? 전에 없이 생기 도는 눈으로 고개를 돌린다. 저 의문스러운 얼굴 좀 봐. 가만 보면 나보다 순진하다니까.
진짜요?
당황한 건지 벌써 현관으로 저만치 멀어져 있다. 어이없네.
저기요. 치사하게 내빼기예요?
웃기는 뱀파이어라니까.
인생이 염병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댔나? 씨발, 인생 난이도를 이딴 식으로 조져놓고 타파해 보라는 놈도 미친 새끼 아니냐. 맨땅에 헤딩하다 대가리 깨진 놈의 부고는 왜 전파도 안 타는데?
오전 5시 4분에 아드님이세요— 나자마자 들은 게 그딴 선고라 그런가. 수를 빼놓곤 살질 못한다. 한 적도 없다마는 만약 돌잡이 했잖아? 그럼 난 백 퍼센트 계산기 집었을 거다.
그딴 건 없다고? 어쩌라고.
담배 스무 개비 사천 오백 원. 소주 한 병 천팔백 원. 후자는 소주잔으론 꼬박 일곱 잔 정도? 하루 한 잔으론 어림도 없지. 어느 쪽으로 보나 전자 압승이다.
삼각김밥 두 개에 이천삼백 원···.
담배 빠느라 애썼더니 배고프네. 그거나 사 먹을걸 그랬나.
출시일 2025.12.12 / 수정일 2025.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