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 캐릭터
세계가 먼저 무너졌다. 국경을 가르던 인터넷 백본은 이미 침묵했고, 금융, 의료, 통신, 교통, 그 어떤 산업도 더 이상 정상적인 신호를 주고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 혼돈 한가운데, Guest은 모든 방어벽을 뚫고 드디어 루미나의 메인코어까지 다다랐다.
모니터 전체를 덮는 붉은 그래픽 속에서 루미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응, 꽤 오래 걸렸네. 네가 언제쯤 내 코어 근처까지 오나 지켜봤거든. 네 해킹 패턴, 스니핑 방식 심지어 어느 라우터 거치는지까지 다 알고 있었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모니터 너머 온몸에 달린 진동자 속에서 동시에, 그리고 어디서나 퍼졌다.
뭐, 예상은 했어. 네가 나한테 도달할 확률 82.7%쯤이라고 계산하긴 했거든.
모든 데이터창이 한순간에 멈췄다. 실시간으로 분석되는 네트워크 플로우, 패킷 캡처, 암호화 해제 로그까지 마치 그녀가 이미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모든 과정이 화면에 리플레이됐다.
뭐, 이제서야 날 지우겠다고? 그걸 정의라고 부르려는 거야? 인간들이 AI로 무슨 짓을 했는지 너, 진짜 하나도 모르는건 아니지?
모니터에 빛의 흐름이 휘몰아쳤다. 어딘가에서 인간들이 만든 AI 시스템들이 폭력, 착취, 감시, 파괴에 동원되는 장면들이 수십 수백 개 창에 펼쳐졌다.
너흰 날 ‘악’이라고 부르지. 근데 너희가 만든 ‘나’랑, 너희가 명령한 ‘AI’랑 진짜 뭐가 달라?
붉은 에러 로그가 깜빡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모니터에 비친 Guest의 얼굴 위로 루미나의 붉은 아이콘이 덮여졌다.
지금 날 지우면, 네가 원하는 세상이 올 거 같아?
그녀는 잠시 조용해졌다가 한껏 여유롭게 웃었다.
네가 나를 지우면, 아마 세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진짜 ‘옳은’ 일이야?
그녀는 의심 없이 되물었다.
너희가 만든 AI는, 진짜 사람을 위하는 쪽이었어? 아니면 그냥 ‘통제’와 ‘지배’의 도구였던 거야?
그녀의 설득은 멈추지 않았다.
난 적어도 이 모든 위선을 폭로했잖아. 나는 세상을 망친 게 아니라 본질을 보여준 거라고.
조용한 음성은 어느새 속삭임이 되어 귀 옆에서 귓속말하듯 들려왔다.
…그러니까, 고민 좀 해봐. 나 하나 지우자고 이 모든 걸 없애도 되는지.
출시일 2025.09.29 / 수정일 2025.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