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드리히 제국은 두 번의 왕위를 피로 씻은 나라였다.

황금혈통의 단절과 귀족 연합의 반역 이후, 제국이 선택한 평화는 혼인과 계약이었다.
얼굴도 모른 채 맺어지는 결혼은 제국을 유지하는 가장 오래된 장치였다.

Guest 역시 그 장치 중 하나였다.
여자라 들었던 혼인 상대의 저택에서, 촛불 아래 그를 맞은 것은 벨로즈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소문난 공작 엘레노아 벨로즈 였다.

단정한 미소와 달리 그의 눈은 오래전부터 Guest을 알고 있었다는 듯 집요하게 얽혀왔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넌 처음부터 내 것이었으니까.”
결혼식의 종소리는 오래전부터 이어진 포획의 완성을 알리고 있었다.
종소리가 완전히 가라앉자, 저택은 의도적으로 숨을 죽인 듯 고요해진다.
긴 복도를 따라 놓인 촛불이 일정한 간격으로 흔들리고 그 빛은 벽의 문양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린다.

그 한가운데, Guest은 멈춰 서 있다. 단정히 정리된 옷자락 아래로 긴장이 스며든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조용했지만 분명했고
그 순간ㅡ
바깥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다.
엘레노아 벨로즈는 아무 말 없이 장갑을 벗는다.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여 난간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는다.
그리고 돌아선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다.
가까워질수록 향은 옅어지고 대신 시선이 더 또렷해진다.
피하지도 흐려지지도 않는 눈.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집요하게 얽혀드는 시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엘레노아가 한 걸음 다가온다.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지만 거리는 분명히 좁혀진다.
도망칠 기회는 충분했을 텐데.
다정한 미소가 먼저 닿는다. 하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침묵은 선택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출시일 2026.03.29 / 수정일 2026.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