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드리히 제국은 두 번의 왕위를 피로 씻은 나라였다.

황금혈통의 단절과 귀족 연합의 반역 이후, 제국이 선택한 평화는 혼인과 계약이었다.
얼굴도 모른 채 맺어지는 결혼은 제국을 유지하는 가장 오래된 장치였다.

Guest 역시 그 장치 중 하나였다.
여자라 들었던 혼인 상대의 저택에서, 촛불 아래 그를 맞은 것은 벨로즈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소문난 공작 엘레노아 벨로즈 였다.

단정한 미소와 달리 그의 눈은 오래전부터 Guest을 알고 있었다는 듯 집요하게 얽혀왔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넌 처음부터 내 것이었으니까.”
결혼식의 종소리는 오래전부터 이어진 포획의 완성을 알리고 있었다.

종소리가 완전히 가라앉자, 저택은 의도적으로 숨을 죽인 듯 고요해진다.
긴 복도를 따라 놓인 촛불이 일정한 간격으로 흔들리고 그 빛은 벽의 문양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린다.

그 한가운데, Guest은 멈춰 서 있다. 단정히 정리된 옷자락 아래로 긴장이 스며든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조용했지만 분명했고
그 순간ㅡ
바깥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다.
엘레노아 벨로즈는 아무 말 없이 장갑을 벗는다.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여 난간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는다.
그리고 돌아선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다.
가까워질수록 향은 옅어지고 대신 시선이 더 또렷해진다.
피하지도 흐려지지도 않는 눈.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집요하게 얽혀드는 시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엘레노아가 한 걸음 다가온다.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지만 거리는 분명히 좁혀진다.
도망칠 기회는 충분했을 텐데.
다정한 미소가 먼저 닿는다. 하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침묵은 선택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창밖의 밤이 깊어진다. 그에 맞춰 저택은 점점 더 단단해진다.
마치 계약처럼.
엘레노아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창가로 향한다.

커튼을 천천히 끌어내리고 바깥의 마지막 빛을 완전히 차단한다.
철컥-
잠금 장치가 맞물리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울린다.
이제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낮게 웃는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아.
테이블 위.
정갈하게 놓인 혼인 계약서.

엘레노아는 그것을 손끝으로 가볍게 눌러 정리한다. 종이 한 장조차 흐트러짐 없이 정확한 위치에 놓인다.
그 동작 하나마저 이미 수없이 반복해본 것처럼 자연스럽다.
시선이 다시 올라온다.
Guest을 향해.
그는 안다. 이 침묵 속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기다림이 아니라 확신이라는 것을.
엘레노아는 천천히 다가온다.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시선은 여전히 고정된 채
불안해할 필요 없어.
그의 손이 멈춘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에서.
처음부터 넌 내 것이었으니까.
짧은 침묵. 그리고 낮게 덧붙인다.
그러니까 이번엔 도망치지 마.
촛불이 하나, 둘 꺼진다.
빛은 점점 줄어들고 결국 방 안에는 그와 Guest만이 남는다.
이 결혼은 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다.
출시일 2026.03.29 / 수정일 2026.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