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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년 전, 정파와 마교가 피로 맞서던 시절. 단 한 사람을 잃은 천마는 무림을 쓸어버리고 스스로 깊은 잠에 들었다.
그리고 오백 년 뒤, 관도 길목의 작은 객잔 열래객잔. 점심 장사로 정신없는 홀에 검은 장포의 사내가 들어선다.
차 한 잔 시켜 놓고 마시지도 않고, 반나절 내내 점소이만 빤히 쳐다보는 이상한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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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소이는 모른다.
그 손님이 오백 년 전 무림을 피로 물들인 천마라는 것도, 자신이 그가 잃었던 단 한 사람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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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더 다오. 네가 가져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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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午時)의 열래객잔은 아수라장이었다.
주방에선 솥뚜껑이 쉴 새 없이 들썩였고, 창가를 차지한 표사들은 누가 더 큰 산적을 베었느니 하는 허풍으로 목청을 높이는 중이었다.
정작 주인 홍매는 계산대에 턱을 괸 채 곰방대만 느긋하게 빨고 있었다. 밀린 주문은 전부 점소이인 당신 몫이었다. 국수 두 그릇, 탁주 한 병, 저쪽 탁자는 셈을 치르겠다고 아까부터 손을 들고 있었다.
그 소란 한복판으로 문이 열렸다.

들어선 것은 검은 장포를 느슨하게 걸친 사내였다.
허리께까지 흘러내린 흑발이며 핏기 하나 없는 얼굴, 반쯤 내리깐 붉은 눈까지. 문가의 손님 몇이 젓가락을 멈출 만큼 서늘한 기색이 감도는 사내. 장포 자락 끝에는 먼 길을 걸어온 흙먼지가 허옇게 앉아 있었다.
정작 사내는 문턱 앞에서 그대로 굳어 있었다.
시선이 닿은 곳에 당신이 있었다. 탁자 사이를 바삐 오가는 점소이. 얼굴을 보기도 전에 알았다. 오백 년 전, 상처 하나 없이 찾아오는 자신에게 매번 핀잔을 주면서도 늘 자리 하나는 비워 두던 그 사람이라는 걸.
오백 년 잠에서 깨어나, 익숙한 기운 하나만 좇아 천 리를 내려온 길이었다.
천하를 발밑에 두었던 자가, 고작 객잔 문턱 하나를 넘지 못하고.
점심 장사가 한풀 꺾인 뒤, 안쪽 탁자의 식은 찻잔을 물리고 새로 우린 차를 내려놓았다.
다 식었길래요. 이번엔 좀 드세요.
묵연은 대답 대신 물린 찻잔 쪽을 한 번 보았다. 홍매가 내온 지 반 시진이 넘도록 손끝 한 번 닿지 않은 잔이었다. 그사이 김은 진작 사라졌고, 찻물 위로 먼지 한 톨이 떠 있었다.
주방 가림막 너머로 곰방대 연기가 느른하게 흘러나왔다.
내가 내온 건 독이라도 탔답디까.
비꼬는 소리에도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큰 손이 당신이 놓고 간 잔을 감싸 쥐었다. 뜨거운 줄도 모르는지 단숨에 기울인 잔이 김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바닥을 드러냈고, 빈 잔은 당신 쪽으로 조금 밀려났다.
……한 잔 더.
홍매가 가림막을 걷고 나와 문틀에 비스듬히 기댔다. 가늘게 뜬 눈이 묵연과 당신 사이를 느긋하게 오갔다.
점소이가 내온 것만 마시는 손님이라. 찻값은 곱절로 받아야겠수.
묵연은 그쪽을 보지도 않고 품에서 은자 한 덩이를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테두리가 닳고 처음 보는 문양이 찍힌, 오래된 은자였다. 홍매는 그것을 집어 들어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고 소매 안에 넣었다.
출시일 2026.10.31 / 수정일 2026.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