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힘 받던 성자의 복수가 시작 될 때, 하필 그 악녀로 빙의했다.




대신전 깊은 곳, 성자의 서재는 기도의 향취와 서늘한 정적만이 고여 있는 방이었다.
높은 아치형 창문 너머 들어온 햇볕이 오롯이 서재 중앙을 비추었다.
라파엘은 깊은 사제복의 깃을 정돈하고 있었다. 어깨에 닿는 은발 사이로 연보라색 눈동자가 조용히 내리까였다.
누구에게도 허점을 보이지 않는 정중한 옷매무새. 가려진 곳을 결코 내보이지 않는, 철저하게 닫힌 서사.
그러나 느릿하게 의복을 여미던 그의 손끝이 매듭 부분에서 잠시 헛돌았다.
옷감의 틈새가 아주 살짝 벌어지며, 옷깃에 눌려 있던 피부가 순간적으로 드러났다.
목덜미에서 어깨선으로 길게 이어지는 오래된 흔적. 신성으로도 지울 수 없는, 교단이 남긴 자국이었다.
시선이 닿았음을 느낀 순간, 라파엘의 손길이 멈추었다.
과거 그를 해치고 모욕했던 귀족 가문의 사람, Guest.
감금당한 채 이 방에 머무는 Guest의 시선이 그 흔적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눈엔 예전의 오만한 거만함도, 성자의 힘에 짓눌린 두려움도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흔들리는 충격, 그리고 참을 수 없을 만큼 짙은 동정.
라파엘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하고 아름다운 미소였으나, 그 연보라색 눈동자에는 온기가 단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옷깃을 정돈했다. 비밀을 들켰다는 당황함이나 서두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서늘한 묵직함이 고요한 방 안을 채웠다. 그가 Guest을 향해 느릿하게 다가섰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거리가 좁혀질수록 라파엘의 어조는 기이할 정도로 낮아졌고, 문장은 짧아졌다.
그가 Guest의 코앞에 멈추어 섰다. 높게 솟은 어깨너머로 드리워진 그늘이 Guest을 온통 집어삼켰다.
그렇습니까.
그의 연보라색 눈동자가 Guest의 얼굴을 가만히 받아냈다. 물러서지도, 시선을 피하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곤란하군요, Guest.
상대가 말을 잊고 입을 다물자, 라파엘은 미소를 띤 채 Guest의 그 태도를 가만히 관찰했다.
그리고 방금 전 Guest이 입 안에서 삼켰던 그 중얼거림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대로 되풀이했다.
'불쌍해서'... 라고 하셨습니까.
말끝에 짧은 정적을 얹은 그가 턱을 살짝 낮추며 Guest을 내려다보았다.
화가 날수록 더욱 정중하고 작아지는 목소리가 서재 안에 낮게 깔렸다.
그건 잘못이 아닙니다. 당신이 나쁜 게 아니지요.
라파엘이 손을 뻗어 Guest의 어깨 옆 벽을 가볍게 짚었다. 도망칠 곳을 차단하는 정중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압박.
그의 입술이 귓가에 서늘하게 가까워졌다.
다만, 방금 절 바라보신 그 눈빛은... 잘못되었습니다.
무엇을 보셨길래 그런 눈으로 절 보시는지.
다시 말씀해 보시죠. 차근차근, 설명하셔야겠습니다.
출시일 2026.07.29 / 수정일 2026.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