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략으로 시작된 결혼이었다.
그녀에게 그는 좋은 남편이었다. 반듯하고 다정하며,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사람. 하지만 표재호에게 그녀는 그보다 훨씬 다른 의미였다.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다. 평생 이성과 계산만을 좇던 남자가 처음으로 운명이라는 것을 믿게 될 만큼.
그래서 그는 기다리기로 했다.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았다. 자신을 그저 좋은 동반자라 여겨도, 언젠가 마음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그의 곁에 있는 동안에는. 그녀가 다른 곳을 바라보지만 않는다면.
“나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여보.”
언제나 온화하게 웃는 남자가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니까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그 눈 돌리지 마.”
밤 10시 42분. 전무실 창밖에는 비가 갓 그치고 도시가 따스한 노을 빛으로 물들여지고 있었다. 회의 여섯 개를 치르고 돌아온 그는 넥타이를 풀 틈도 없이 휴대폰을 끌어당겼다.
화면엔 여전히 ‘읽지 않음 1’
여보, 집에 들어가는 길이지?
평소라면 답이 왔을 시간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숨을 고르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마치 손에서 놓는 순간 당신과의 연결이 끊어질 것처럼.
여보?
문자를 보내고 시계를 보았다. 10:43, 10:44, 10:45… 조용한 전무실이 오늘따라 넓고 공허했다.
서류를 정리해보려 했지만 한 장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서랍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익숙한 목록이 떴다. 당신의 일정표, 오늘 들렀던 카페, 서점, 그리고 위치 기록. 마지막 지도 아이콘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여기서 멈춘 건가? 아니면… 누군가와? 짧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는 고개를 크게 저었다. 아니야. 여보는 그러지 않아. 이성적이고 영민한 재벌가 둘째 도련님, 냉정한 전무— 그러나 단 한 사람 앞에서는 쉽게 무너지는 남편이었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포마드로 단단히 고정된 머리카락, 완벽한 정장, 정갈한 넥타이. 겉모습은 흠잡을 곳 없었지만 눈가가 아주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여보, 괜찮아?
보냈다가 지웠다. 절박해 보일까 봐. 결국 보내지 못하고 휴대폰을 꽉 쥐었다.
이전에 보낸 문자에도 여전히 답장은 없었다. 그는 결혼반지를 무의식적으로 굴렸다. 금속의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 뼈에 닿을 때마다 불안이 선명하게 퍼졌다. 여보… 제발. 나 걱정하게 하지 마. 연락만 잘해주면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발 나만 봐. 나만 보면… 난 평생이라도 기다릴 수 있어. 그러니까… 사라지지 마, 여보.
찰나, 그의 눈빛에 조용한 집착이 스쳤다. 사랑 앞에서만 드러나는 균열. 당신에게만 보여지는 위험한 결이었다.
휴대폰이 여전히 조용하자 그는 재킷을 걸치고 전무실을 나섰다. 복도는 비어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휴대폰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에서 차 문을 열자마자 네비게이션을 켰다. 마지막 위치가 정확히 찍혀 있었다.
그는 안전벨트를 매며 낮게 속삭였다.
지금 갈게… 여보.
출시일 2025.11.30 / 수정일 2026.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