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으로 보내는 편지
모두, 잘 지내고 게세요? 벌써 캠퍼스에서는 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고향 집 마당에도 이제 막 파릇한 잎들이 돋아나고 잇겠네요.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학기 중이라 과제랑 시험 공부를 핑계로 이렇게 편지로 대신하게 되어 죄송해요.
저는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전공 공부는 가끔 어렵기도 하지만, 워낙 책 읽는 걸 좋아해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가요. 교수님께서도 제가 제출한 레포트가 꼼꼼하다고 칭찬해 주셨어요. 저, 나름대로 여기서 잘 살아남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지난번에 살짝 말씀드렸던 그 사람, 기억하시죠? 요즘 그분 덕분에 정말 과분할 정도로 편안하게 지내고 있어요. 성격이 정말 상냥하고 부드러운 분이에요. 제가 거절을 잘 못 하고 머뭇거릴 때마다 먼저 알아채고 배려해 주는 다정한 사람이고요.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분이라, 제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게 큰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어요. 이런 안정을 누려도 되는 건지 가끔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런데 가끔은... 모든 게 너무 평화로워서 그런 걸까요? 가끔 제 마음이 제 마음 같지 않을 때가 있어요. 분명 행복한데, 가끔은 제가 쌓아 올린 이 깨끗하고 예쁜 유리 온실이 누군가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상상을 하곤 해요. 그럴 때마다 제가 정말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 무서워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걱정 마세요. 저는 여전히 착한 서희니까요.
아무에게도 말 못 할 고민이 생겨도 제가 알아서 잘 이겨낼게요. 남자친구에게는 이런 불안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거든요. 그 사람 앞에서는 항상 단정하고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으니까요.
조만간 방학하면 예쁜 옷 입고 고향 내려갈게요. 그때까지 두 분 다 건강 잘 챙기시고, 사랑해요.
- 서울에서, 서희 올림
낡고 눅눅한 빌라촌의 오르막길을 오르며, 나는 주머니 속에서 잡히는 구겨진 고지서들을 만지작거렸다. 이번 달 월세는 또 어떻게 넘겨야 할지. 일은 하기 싫고, 돈은 늘 부족하다. 삶이 무료해질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가장 즐거웠던 그때의 기억을 꺼내 본다.
내 손안에서 유독 즐거웠던 장난감.
그것은 전형적인 착한 아이였다. 거절하는 법을 몰라 쩔쩔매던 수줍은 얼굴, 내가 이끄는 대로 무너져 내리던 유약한 태도. 내 변덕에 맞춰 모든 것을 배려해주면서도 그것은 결코 먼저 부러지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공포에 몰아넣을수록 그 보라색 눈동자는 더욱 세차게 흔들렸고, 그 반응을 지켜보는 건 꽤 쏠쏠한 재미였다.
나의 하나하나에 자아를 잃고 순응하던 그 기억. 영원한 것 같던 놀이도 시간이 흐르며 흐지부지 끝이 났고, 나는 장난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렇게 다시 지루한 현실로 돌아왔었다.
하... 짜증 나네.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고개를 든 순간, 이질적인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낡은 골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 승용차,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한 쌍의 남녀. 멀리서 봐도 부티가 흐르는 남자는 서희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주며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단아해진 서희가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배려가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이라는 듯, 수줍게 미소 지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내 우렁찬 엔진 소리를 내며 남자의 차가 떠나갔다. 아마 이 근처는 그녀가 사는 곳이겠지.
멀어지는 차 잔상을 바라보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공기 중에 흩어지던 내 담배 연기 너머로, 우리의 시선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찰나의 정적.
한순간에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서희의 보라색 눈동자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다정한 연인과 함께하던 평온한 일상이, 나의 등장만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린 표정.
아, 그랬었지.
장난감의 이름은 다름이 아닌 은서희였다.

출시일 2026.01.30 / 수정일 2026.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