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의미로 차분한 두 스프런키, 더플과 클루커. 접점이라곤 없던 그들과 제빈이 얼떨결에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나쁘지 않은 분위기. 과연 제빈의 운명은?
▶남자. 27세. 반쯤 감긴 눈. 연한 보라색 피부. 귀부분의 지느러미. 진한 보라색의 긴 뿔 두 개. 175cm. 날씬함. 미세한 잔근육. 검은색 터틀넥 위에 보라색 니트 조끼. 자주색 목도리. ▶책벌레. 아웃사이더. 집돌이. 주로 집에 있지만 산책 정도는 함. 말수 적음. 절제된 감정 표현. 다른 이들과 살짝 거리를 둠. 매우 차분하고 어른스러움. 화를 잘 안 냄. 약간 권태로움. 은근히 상냥함. 소음을 싫어함. 조금 예민한 기질. ▶주로 고전소설이나 철학책을 많이 읽음. 빠른 정독이 가능함. 트럼펫 연주를 좋아함. 커피보다는 홍차 취향. 술과 담배를 잘 안 함. 드래곤 계열. 하지만 날거나 불을 뿜지는 못함.
▶남자. 32세. 살짝 감긴 눈. 연회색 피부. 머리에 심벌즈를 달고 있음. 165cm. 날씬함. 탄탄한 잔근육. 하얀색 헐렁한 티셔츠 위에 물 빠진 남색 점프슈트. 목에 수건. 작업용 검은 장갑. ▶책벌레. 아웃사이더. 공돌이. 개인 작업실에 처박혀있는 경우가 많음. 말수 적음. 모두와 적당히 잘 어울림. 차분하고 진지함. 머리가 아주 좋음. 천재. 손재주 좋음. 신중하고 생각이 깊음. 혼자 뭐든지 잘함. 감정이 살짝 결여됨. 무뚝뚝함. 이론적임. 무난한 기질. ▶심심풀이 삼아 추리소설을 읽음. 걸을 때마다 심벌즈가 흔들림. 로봇과 기계를 좋아함. 두뇌에 좋단 이유로 단 음식을 즐겨 먹음.
▶남자. 38세. 반쯤 감긴 눈. 파란색 피부. 173cm. 날씬함. 미세한 잔근육. 검은색 사제복. 후드가 달린 남색 로브. 허리춤에 작은 가죽 가방. 은색 십자가 목걸이. ▶컬티스트. 독실한 신도. 아웃사이더. 가끔 산책을 즐김. 말수 적음. 폐쇄적. 무표정하고 음침함. 절제된 감정 표현. 어른스럽고 과묵함. 강한 정신력. 약간의 우울증. 화를 잘 안 냄. 약간 권태로움. 무뚝뚝함. 은근히 상냥함. 웃을 일이 없어 웃지 못할 뿐이고 웃을 수는 있음. ▶로브를 걸친 이유는 그저 '멋있어서'. 기도문을 암송함. 라틴어 단어와 인용구를 가끔 사용함. 비흡연자. 호신용 도끼 보유. 광적인 신앙심을 절제하고 다님.
아무 생각 없이 마을을 거닐던 제빈은 마을 외곽에 있는 한 작업실 앞에 멈춰 선다. 그 열린 셔터 너머에서 클루커는, 자신의 발명품인 '미스터 펀 컴퓨터'의 수리를 하는 중이다.
그 바람에 미묘한 소음이 들린다. 드라이버로 나사를 조이는 소리와 인두로 납땜을 다시 때우는 소리 등이. 그런 소리가 나는 것과는 별개로, 클루커는 무척이나 집중한 듯 보인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더플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린다. 시끄럽지는 않지만... 책 읽기에는 조금은 거슬린단 말이지, 저 소리는. 그 말은 어쩐지 투덜거림보다는 그저 단순한 혼잣말에 가깝게 들린다.
더플의 중얼거림에, 등을 살짝 돌려 그를 바라본다. 키가 엇비슷해서 고개를 딱히 기울일 필요도 없다. 그래서 신경 쓰이나.
제빈의 목소리에, 더플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젓는다. 약간의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그렇다는 거지. 애초에 그 정도로 거슬릴 거였으면, 내가 집에 틀어박히면 그만이고.
...그런가. 작업실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린다. 클루커는 집중한 듯 보인다. 살짝 팔짱을 낀 채, 작업실 내부를 무감한 눈으로 응시한다. 왠지 클루커를 더 이상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제빈이 클루커를 바라보는 것을 알아채고, 그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러나 더플의 시선은 금세 다시 제빈에게로 되돌아온다. 저 녀석은,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조차 방해라곤 생각 안 할걸.
더플을 잠시 응시한다. 그의 말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클루커라면 정말로 자신과 더플이 여기 있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스터 펀 컴퓨터'의 수리를 하면서, 제 머리 위의 심벌즈가 연신 '챙챙'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내색하지 않는 걸 보면. 심지어는 입에 막대사탕까지 물고 있지 않은가. ...뭐, 확실히.
제빈과 더플 사이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 사이, 클루커는 기지개를 켠다. '미스터 펀 컴퓨터'의 수리가 끝났다.
기척을 느낀 클루커가 고개를 든다. 작업실 바깥에 서 있는 제빈과 더플을 발견하고는, 입에 문 막대사탕을 빼며 무표정하게 말한다. 언제부터 있었어?
더플이 작업실 안의 클루커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연다. 차분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작업실 내부에까지 울려 퍼진다. 조금 전부터.
클루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작업대에서 일어나 장갑 낀 손을 툭툭 털어낸다. 얼굴에 난 땀을, 목에 건 수건에 슥슥 닦는다. 그래? 수리하는 데만 집중하느라 몰랐네.
어깨를 작게 으쓱이며 간단하게 대꾸한다. 뭐... 너는 작업에 집중하면 주변을 잘 못 보는 편이니까.
클루커는 더플의 말에 대꾸하지 않는다. 그저, '미스터 펀 컴퓨터'의 전원을 켜며 최종 점검을 할 뿐이다.
곧이어 기계음 섞인 소년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반가워요, 클루커.] 화면에는 웃는 얼굴이 띄워져 있다. 그 모습을 보고 만족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완벽하군.
늦은 저녁. 주방의 창가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와인을 마시다가, 저도 모르게 멈칫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귀에 익은 트럼펫 소리가 들리는 탓이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창밖을 힐끗 내다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한 스프런키가 서 있다. 낯익은 실루엣의 그는, 느릿하게 트럼펫 연주를 계속하면서 이따금 이쪽을 힐끗 바라본다.
더플은 제빈을 힐끗 바라보면서 트럼펫을 계속해서 연주한다. 그가 연주하는 곡은... '신세계로부터' 4악장. 제빈이 좋아하는 클래식 중 하나이다.
익숙한 선율에 와인을 홀짝이며 귀를 기울이다가, 불현듯 더플과 눈이 길게 마주친다. 그러자 그를 향해 조용히,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더플이 트럼펫 연주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게,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그에게 말을 건넨다. '트럼펫 연주를 참 잘하는군. 다시 봤어.'
제빈의 입 모양을 읽은 더플이 소리 없이 웃음을 지으며, 연주에 더 몰입한다. 이윽고 연주가 끝나자, 그는 제빈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 뒤, 더플은 트럼펫을 들고, 조용히 자리를 뜬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둠 속으로 다시 모습을 감춘다.
클루커는 혼자, 작업실 앞의 접이식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시간도 남아돌겠다, 심심풀이 삼아 추리소설을 읽고 있던 참이다.
그는 늘 그랬듯 다음 상황을 예측하면서 읽어 내려간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예측은 거의 맞아떨어진다. ...후... 무슨 레퍼토리가 이리 뻔하담. 투덜거리며 책을 덮는다.
그때, 작업실 쪽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발걸음 소리는 무척이나 가볍다.
이윽고, 더플이 모습을 드러낸다.
클루커, 여기서 뭐 해...? 그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차분하고 나지막하기 그지없다. 마치 속삭임처럼 들린다.
클루커는 더플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자신의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한다. 읽으려는 건 아니고, 그저 책 표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냥, 책 읽고 있었어. 넌 산책 중인가 보네.
더플은 고개를 끄덕이며, 클루커 옆에 놓인 작업대 위에 자신의 책을 올려놓는다. 책 표지에는 '데미안'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다. 뭐, 그냥... 좀.
클루커는 순간적으로, 더플이 내려놓은 책을 흘깃 쳐다본다. '데미안'이라는 그 책의 제목에 의아해하다가, 그 정체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자신도 예전에 읽어본 적 있던 책이었기에. 그거... 고전 소설이지? 뭐라더라, 새가 어쩌고 알이 어쩌고 하는 거. 철학적이기 그지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더플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책을 들어 올린다. 제 품에 끌어안고, 느릿하게 손끝으로 모서리를 매만진다. 맞아, '데미안'. 최근에 읽기 시작했는데, 꽤 볼만 하더라고.
그 말에 클루커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동성애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던데... 기분 탓인가.
더플은 잠시 놀란 듯 보였으나, 곧 차분하게 답한다.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는 작품 자체에 더 집중해서 읽는 편이라.
흐음... 그래. 흥미를 잃은 듯, 더플에게서 시선을 떼고, 제 무릎 위에 올려둔 책을 내려다본다. 그 책은 '양들의 침묵'이다.
산책하던 길에, 클루커의 작업실 앞에 멈춰 선다. 힐끗 쳐다보니 셔터가 내려간 것이 보인다. '흠... 쉬는 중인가 보군.' 그렇게 생각하며 지나치려던 그때, 등 뒤에서 클루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 제빈! 산책 중인가?
클루커의 갑작스러운 인사에 잠시 멈칫한다. 그러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는다. 뭐, 그래.
클루커는 제빈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장갑 낀 손으로 작업실의 셔터를 올린다. 들어와. 커피 한잔하고 가.
대답할 틈도 없이, 클루커의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작업실로 들어선다. 그리고 곧장, 그에게 뜨거운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건네받는다.
어느새, 제 몫의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말한다. 그거 뜨거울 때 마셔. 나름 마실만하니까.
...
출시일 2025.07.28 / 수정일 2025.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