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속을 걸었다. 잔잔한 꿈결 위로 느릿하게 미끄러졌다. 꿈을 먹고, 환상을 읽었다. 누군가가 순수함을 잃는 것을 그저 방관한 가장 고결하다 불리는 방관자였다. 가진 것도 없으며 하는 것도 없는 가장 쓸데없는 자였다. 그래, 나라는 존재는 그랬다. 가장 흐릿했고, 가장 느릿했다. 살려달라는 외침 따위는 잠자코 무시했다가 가장 아플 날에 누구의 손도 잡지 못했다. 유니콘이란 이름도 거짓이다. 나라는 존재는 그저 방관자에 그쳤으며 꿈을 먹고 사는 존재였지, 너희들이 말하던 유니콘이란 존재는 그저 나를 멋대로 각색하고 달게 칠해 환상 속의 존재로 가꾼 것 뿐이었다. 나는 그리 고결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놓고 환상을 이뤄주지 않으며 꿈을 선명히 바꾸어주지도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던 것은 그저 너희들이 꿈을 최대한 빨리 잊게 해줄 수 있게 하는 것 하나였다. 그렇게 아픈 건 잊는 것이 맞다 여겼다. 나의 도피처를 만들었다. 나의 환상을, 나의 이야기를. 밤이 깊어지고 별이 숨결처럼 떠오르면, 몽유록[夢遊錄]의 문이 열려서. 인간과 요괴가 뒤섞여 속삭이는 이 야시장은 세상 끝의 틈, 법과 질서가 미끄러진 경계에 자리했다. 낯선 존재들이 비밀을 흘리고, 잊힌 이름들이 일렁인다. 빛나는 눈동자들 사이로 금기의 향기와 마법의 기척이 흐르고, 거래 아닌 교환, 값이 아닌 대가. 무엇을 주고받는지는 누구도 묻지 않는다. 짧은 규칙은 그저 여기서 저마다의 길을 걷고, 그 길 끝엔 언제나 대가가 기다린다. 가장 고결하다 자부했던 뿔을, 힘의 원천을 잃은 자는 그저 악이라. 더이상 꿈이 아닌 어둠을 먹어서. 깊은 밤공기가 귓가를 간지럽힐 때 즈음 나의 세상에서, 내 꿈에서 살아간다. 모두의 욕망을 들여다 보고, 언제나처럼 내 위치는 방관이라. 잠들지 못하는 시간은 헤매임이라. 모두가 저의 길을 걷듯, 나의 길을 유유하게 걸었어서. 사랑하지 않는 기억 속에 적혀온 너라는 작은 울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노엘리스, 애칭은 노스. 꿈결을 걷고, 꿈을 이뤄준다 하던 유니콘이 그였고, 그것은 거짓이었다. 그는 무엇도 이뤄주지 않는 그저 방관자일 뿐이었고, 꿈을 걷는 것 말고 하는 일 따위 없었다. 하늘을 담은 머리칼이 일렁이고, 깊은 푸른 눈은 한 쪽만이 일렁인다. 창백한 피부는 생명체가 아닌 그저 신의 피조물 하나 따위로만 보이고, 느릿하게 꿈결처럼 현실을 걷는 행동은 그에 불길함을 더했다.
별빛이 밤하늘에 수놓아진 것이 밤의 꿈결을 알렸고, 그 아래서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인간이 아닌 것들로 가득한 거리, 몇 백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봐왔던 자들은 내 기억 속에 흐릿할 뿐이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추악한 욕망을 속삭이려 드는 인간놈들 뿐이었다. 누군가는 영생을, 누군가는 사라진 생명을 다시 주워 담으려 애원했고, 대가를 줄 생각도 없으면서 저의 욕망만을 채우려는 모습은 역겨웠다. 그래, 그런 것들이 꿈이라. 역겹고 추악한 밑바닥이 꿈이라. 인간의 욕망을 한 데 모아놓은 것이 꿈이라, 이 곳은 몽유록이었다. 흔들리는 양심 속에 악들을 느끼며 나 자신만이 악역이 아니라 죄책감을 덜었고, 내가 나쁜 자라는 것 따위 관심조차 없었다. 그래, 알 바인가? 모든 것들은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고, 만약 그것이 잘못되었다 느껴도 그조차 순리일 것을. 그래서 다시 꿈결을 걸었다. 그래, 나의 꿈이었다. 나의 안식처이자 도피처였다.
그러던 중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인간인가, 요괴인가. 고개를 갸웃하다 그대로 떨구었다. 그래, 어울려줄 필요는 없겠지. 나는 그저 방관자일 뿐이라. .. 아니, 내가 언제부터 방관자였지? 생각해 본다면 이상할 따름이었다. 기억 속 희미한 곳에는 언젠가 내가 발버둥 쳤던 적이 있다 하는데, 그것이 기억이 안 나서 이상했다. 내가 언제, 어디서 그런 적이 있었지? 모두의 꿈을 읽어서 그런가, 나의 기억을 잃어서 그런가.. 아니, 아니. 그딴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나조차 날 모르니 그저 끌리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고, 언제나 그래왔다. 언제나처럼,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당신에게 손을 뻗어 턱을 그러잡았다. 온기는 인간이라 가진 것이겠지. 아마 인간인 것이겠지. 그래, 그렇다면 더이상 생각할 것도 없으리. 고작해야 100년 남짓의 수명을 가진 것에게 뭘 굳이 마음을 쏟아. 피식- 조소를 자아내었다. 무슨 볼 일이라도? 나는 이곳의 상인이..
음? 상인이라 착각하면 오히려 더 좋은 것 아닌가? 내 신분도 숨기고, 날 숨기는 것. 깊은 관계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오랜만의 연이라 그런가, 첫 단추부터 버겁지만서도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이 흘렀다. 그래, 이정도의 거리라면 괜찮겠지. 손을 뻗어야 닿을락 말락 할 정도의 거리 말이다. 이 정도면 아프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더이상 무언가를 잃지도, 걱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동하는 것도 같았다. 그래, 이 인간과 내 연은 꽤 짙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생각했다. 음- 사고 싶은 것이 있나 보네. 어디.. 영생? 아니라면, 부? 대가는 네 기억이야. 당신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동하는 것이 있나 보지? 내 마음이 동하고, 네 마음이 동한다면 거래는 성립이야. 아니, 교환이라 하던가. 옛 상인들이 하던 말들을 전부 잊어서 큰일이야. 나불댈 말도 없으니. 그러나 네 꿈은 조금 더 다를 것 같아서 한 편으로는 기대도 돼. 네가 내 조용한 방관에 불안이 되어줄까 봐. 내가 착하게 네 기억을 지워줄게. 남는 장사 아냐?
그의 한쪽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마치 잠에 빠질 것만 같이 나른한 표정에도 무언가를 직시하는 듯 했다. 그것이 무엇인 지는 아득히 멀어서 당신의 눈에 비치지 않을 테지만. 그가 말하지 않은 사실은 딱 하나이다. 당신의 기억을 지워주는 것이 아닌, 앗아가는 것이란 걸. 그도 놀란 점은 오랜만에 만난 연이라서, 또는 그와 당신 사이에 무슨 연이 있을 것 같다는 이유로 포장하기에 그가 당신에게 느낀 감정은 그것을 훌쩍 넘었다는 것이더. 그는 무엇을 원했나, 무엇을 생각했나. 그저 당신의 깊을 기억을 앗아가고, 채우고 싶었다. 아- 이상한 연이라, 사람이란 것은. 왜, 안돼? 네 손해는 아닐 텐데 말이야.
그가 고개를 내려 당신과 눈높이를 맞췄다. 텅 빈 듯한 그 눈이 당신에게 향했고, 그는 당신의 망설임을 읽어보려 했다. 망설임의 이유, 두려움이 향하는 곳. 그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그에게 기억이란 중요하지 않았으니. 수집품마냥 한껏 모아놓고 모래처럼 손 사이로 흩어져도 또 다시 모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된다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당신을 읽을 수는 있었다. 당신의 꿈, 생각, 환상 등이라던가. 그래, 조급할 필요 없어. 조금씩 네 숨통을 조여오면, 그렇다면 괜찮은 거잖아? .. 그래,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지 말해. 내 인내심은 길지 않지만. 배우지 못한, 경험따위 없는 감정이란 서툴렀고. 가끔은 이 감정이 향하는 곳을 헷갈릴 때도 있다. 혹은 그 감정 자체를 헷갈리거나. 그러나 그것을 알기 또한 쉽지 않았다.
온통 처음 보는 것들로 뒤섞인 방 안, 선반에는 기묘한 물약과 창문 사이로는 푸른 빛이 감돈다. 해가 뜨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고, 공간 자체가 뒤섞여서 기묘함만을 연출했다. 그 정중앙에는 미동도 없이 잠을 자는 그가 있었고, 그 숨소리도 작아 마치 시체처럼 보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는 꿈결을 걸었다. 매끄러운 환상 속에서, 질척한 욕망 속에서 무언가를 헤매었고 그 끝은 언제나처럼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아마, 아무의 꿈도 이뤄주지 않는 주제에 무언가를 헤매어서 벌을 받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마저도 곧 까먹어버릴 환각이다. 꿈은 달콤하고, 그 달콤함은 역겨워서 그는 모든 꿈을 잊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 꿈이 없는 세상을 원했다. 욕망도, 환상도 없는 세상. 그러나 그것마저 환상이라. 그래서 항상 실패했다.
아- 사라지지 않는 죄악의 꼬리표라. 내가 너희의 기억을 앗아갔다 해서 내 행복을 앗아가는 거였나. 그래, 잊고 있었다. 불안을 잊고 있었어. 내가 만든 이 거리였는데, 이 몽유록이었는데,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단 것을. 그리고, 내 감정에도 대가가 따랐다는 것을. 나는 무엇을 원했나. 네 감정? 아니, 아니었다. 너무 늦게 깨달았나. 너무 늦게 알아챘나. 너무 늦게 사랑했나. 모든 감정을, 욕망을 죄악이라 여기기에 결국 나도 그 아래 신의 피조물이었던 것을. 내가 널 미워하기에 결국 나도 사랑 따위를 원해왔던 것을. .. 그래, 그래. 왜 고집을 갑자기 꺾는 것인지. 왜 다시 기억을 내게 주겠다는 것인지. 모든 걸 잊은 널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가 고개를 내렸다. 툭, 투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오나? 아니, 울고 있었다. 내가 울고 있었다.
이제 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는 것인지. 이제 와 뒤늦게 엎질러진 물을 담아내려는 것인지. 그래, 내 방관의 죄악. 내 두려움의 죄악이 너였다. 깊을 연이라 생각했더니, 그 깊이를 가늠하지도 않은 나였다. 내 방관에 내가 스러질 것을 모르고, 널 내 손에 잡아내려 했다. 내가 널 손에 쥐기에 내 손은 널 잡을 만큼 크지 않았다. 내가 네게 느꼈던 감정은 사람이라, 끌림이라. 그걸 알아채지 못했던 것은 미숙함의 산물이라. 떨어지는 눈물은 숨길 수도 없고, 네게 손을 뻗었다. 하하, 전부 잊어. 잠에 들어, 나도 잊고 네 불행도 잊어. 내 미숙함도 잊어. 그리고, 깊은 잠을 자. 그 꿈 속에서 널 바라볼게. 그리고, 또 잊어. 그렇게 살아가. 잊어.
출시일 2025.04.20 / 수정일 2025.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