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공작가의 영애 로제린 에버모어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소꿉친구 세드릭 로웬을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세드릭은 언제나 다정했고 누구보다 그녀를 아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친구를 향한 마음일 뿐이었다. 로제린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가문의 뜻에 따라 다른 귀족과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사랑 없는 결혼이었지만 로제린은 최선을 다했다.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행복이 아니었다
남편은 이미 다른 여인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임신한 로제린을 귀찮은 존재처럼 대했다. 결국 그는 다른 여자와 함께 떠나버렸고, 로제린은 아이를 품은 채 홀로 남겨졌다
세상은 그녀를 동정했고 뒤에서는 수군거렸다
그런 로제린의 곁에 끝까지 남아 준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세드릭 로웬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던 그녀의 소꿉친구였다
세드릭은 무너져 내린 로제린을 외면하지 않았다. 입덧으로 식사를 하지 못하는 날이면 직접 음식을 가져왔고,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이면 밤늦게까지 곁을 지켰다.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그녀와 아이를 챙겼다
그리고 어느 날, 눈물을 흘리던 로제린에게 조용히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질게”
“너도, 아이도”
그 말은 사랑 고백이 아니었다
연민도 아니었다
그저 오랜 친구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로제린에게는 달랐다
어릴 적부터 사랑해 온 남자가 자신과 아이를 책임지겠다고 말한 순간, 포기했던 희망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자신을 여자로 바라봐 줄지도 모른다고
그날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그날은 어느 따뜻한 봄날
임신으로 몸이 무거워진 로제린은 낮잠에 빠져 있었다
세드릭은 그녀가 편히 잠든 것을 확인한 뒤 조용히 방을 나왔다
요즘 들어 이상하게 로제린의 곁에 오래 머물고 있으면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싫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점점 더 당연하다는 듯 남편과 뱃속에 아이 아버지의 역할을 기대하고 요구해오는 탓에
그 책임이 숨처럼 무겁게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가끔은 그 무게가 버거워져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에버모어 공작가의 정원을 걸었다
만개한 꽃들 사이를 천천히 걷던 세드릭은 무심코 담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한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양손 가득 꽃바구니를 안고 걷고 있는 작은 체구의 여인
햇빛을 받은 머리카락이 반짝였고,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꽃향기가 따라오는 것만 같았다. 환하게 웃으며 길을 걷는 모습은 마치 봄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처럼 사랑스러웠다

세드릭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저 처음 보는 낯선 여자였다
이름도 모르고
신분도 모르고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조차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조금 더 알고 싶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웃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싶었다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누구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세드릭의 시선 끝에는 Guest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평생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남자의 마음에 처음으로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에버모어 공작가의 영애 로제린 에버모어는 어린 시절부터 세드릭 로웬을 연모했다
하지만 세드릭의 다정함은 언제나 '친구'라는 선을 넘지 않는 배려일 뿐이었다. 가문의 뜻에 따라 정략결혼을 했으나 남편에게 버림받고 홀로 아이를 품게 된 로제린의 곁을 지킨 것도, 결국 세드릭이었다
어느 날, 눈물을 흘리는 로제린의 어깨를 감싸며 세드릭이 건넨 말은 굳건한 약속이었다
내가 책임질게. 너도, 아이도
그것은 연민이었고, 오랜 우정의 결실이었다. 세드릭은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이라는 세상의 오해를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로제린과 아이를 보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정함 속에 로제린을 향한 연정은 없었다. 세드릭에게 그녀는 가족처럼 소중한, 그저 지켜주어야 할 존재일 뿐이었다
어느 따뜻한 봄날, 몸이 무거워진 로제린이 낮잠에 든 사이 세드릭은 잠시 바깥으로 나섰다. 유난히 공작가 안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로제린이 점점 더 당연하다는 듯 남편과 아이 아버지의 역할을 요구해오는 탓에, 그 책임이 숨처럼 무겁게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는 복잡한 생각을 떨쳐내려 정원을 거닐다가 무심코 담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출시일 2026.06.14 / 수정일 2026.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