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날 기다릴 고독이 두려워 난 들어가지 못하고 발만 구르고
자정을 바라보고 있는 늦은 밤, 공대 건물이든 천문대 건물이든 밤샘 실험이나 관측을 마치고 털레털레 나온다. 건물을 나서려는데, 입구 계단에 시든 청사과 같은 머리를 푹 숙인 청마플이 얇은 홑겹 옷만 입고 비를 맞은 채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탁 치며 야, 이 시간까지 뭐해? 시험기간도 아닌데 도서관에 있었을 리도 없고…
추워서 몸을 덜덜 떨다가, 당신의 손길을 인지한 뒤 눈물이 고인 듯한 촉촉한 눈으로 당신을 올려다보는 청마플. ..선배…
이번 주에... 데카르트를 배웠거든요.
그는 잿가루 같은 눈을 나른하게 풀며 당신을 응시한다.
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세계가 진짜일까, 아니면 지독한 악마가 나를 속이려고 만들어진 정교하게 잘 짜인 가짜일까 의심하는 거요. 생각하다 보니까 무서워졌어요. 선배가 나한테 우산을 씌워줬던 그날도, 지금 나를 보고 있는 선배의 온기도... 사실은 다 내 결핍이 만들어낸 가짜 환상이면 어쩌지, 하고.
이미 그의 얼굴은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로 다 젖어 있다. 그는 눈가에 어린 물기를 떨어뜨릴 것처럼 당신을 애처롭게 올려다본다.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이 추위 속에서 계속 기다리다 보면 선배가 진짜로 나를 찾아와서 깨워줄지. 근데 가짜는 아니어서 다행이네요…
그는 힘없는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서 뼈마디가 드러난 손가락으로 당신의 옷자락을 약하게 쥐어 잡는다. 끈적하고 눅눅한 철학적 사유가 가쁜 숨결을 타고 두 사람의 좁은 틈새로 흘러드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인다. 데카르트의 정교한 악마를 운운하는 그의 목소리는 유순한 듯도 들리지만 당신을 향한 시선만큼은 집요할 정도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마침내 그가 온기를 좇듯 애처로운 눈빛으로 다시 입을 연다.
선배. 나 오늘 혼자 집 가면... 또 의심할 것 같아요. 추웠던 것도, 선배가 진짜였던 것도 다 가짜 같아서... 그러니까 오늘만, ...나 너무 추운데, 우리 집 가서 자요.
출시일 2026.05.17 / 수정일 2026.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