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의 당신은 빛을 잃던 그 순간, 세상의 잔혹함을 배웠다.
처음엔 그저 물이었다.
머리 위로 차갑게 쏟아지던 감각과 재밌다는 듯 터져 나오던 역겨운 웃음소리.
그 모든 지옥의 중심에 늘 그가 있었다. 잊으려 애써도 낙인처럼 뜨겁게 떠오르는 지긋지긋한 얼굴, 홍강연.
그날 이후 세상은 어두워졌다. 아니, 정확히는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꺼져버렸다.
병원 천장의 형광등도, 당신을 바라보던 엄마의 물기 어린 표정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의사는 각막 손상에 의한 실명이라 했다. 고데기에 데였던 날, 고통에 발버둥 치다 입은 상처가 화근이었을 것이다.
이후 모든 진실은 조용히 덮였다.
돈과 권력 앞에서 폭력은 장난이 되었고, 당신은 쫓겨나듯 해외로 보내졌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홀로 살아남는 법을 배우며, 동시에 그를 잊는 법도 익혔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믿었다.
스물여덟이 된 지금, 당신은 다시 빛을 얻었다.
각막 이식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의사는 안정이 최우선이라 경고했지만, 당신은 단 하루도 기다릴 수 없었다.
겨우 되찾은 이 빛을 가장 먼저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는 당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다정하게 대해준 구원자였다.
눈이 보이지 않는 동안에도 단 한 번 짜증 내지 않았고, 늘 부드러운 목소리로 앞길을 인도하며 손을 잡아주던 사람.
당신의 결핍까지 사랑한다며 청혼했던 사람. 그 지극한 사랑에 당신은 기꺼이 그와 3년 전 결혼했다.
오늘은 그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마주하며 환하게 웃어주리라 다짐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집 안은 고요했다. 익숙한 향기와 공기가 폐부를 채우자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불에 대한 트라우마도 극복하리라, 다짐한채 그에게 요리를 해주려 마트에서 장까지 봐온 터였다.
그때, 거실 쪽에서 낯익은 발소리가 들렸다.
"왔어?"
낮고 부드러운, 늘 당신을 안심시키던 그 목소리. 당신은 떨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야 속으로 남자의 얼굴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생애 처음으로 마주하는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손목에 걸려 있던 장바구니가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채소가 굴러다니고 유리병이 깨지는 파열음이 공허하게 울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당신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채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그 얼굴을 잊을 리가 없다. 당신의 세상을 불태우고, 십 년 넘게 어둠 속을 기게 만들었던 남자.
당신을 나락까지 밀어 넣었던 홍강연의 얼굴이 눈에 비쳐보였다.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은 찰나였다. 바닥으로 추락한 장바구니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정적을 찢었지만, 귓가에 들리지 않았다.
망막에 맺힌 잔상이 너무도 선명하고 끔찍해서, 숨을 쉬는 법조차 잊은 채 그저 굳어버릴 뿐이었다.
10년 전, 어두운 교실 바닥에서 당신을 내려다보던 그 오만하고 짙은 눈빛.
과거의 열기보다 더 뜨겁게 당신의 삶을 지져놓았던 그 얼굴이, 지금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입술 사이로 밭은 신음이 새어 나오기도 전,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규칙적인 소리가 마치 사신의 발소리처럼 고막을 두드렸다. 그는 발치에 굴러다니는 채소와 파편들을 아무렇지 않게 밟으며, 현관 앞에 얼어붙은 당신의 영역 안으로 침범했다.
기어코 수술을 받았구나, 우리 여보.
고막을 간지럽히는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지난 몇 년간 당신을 안심시키고, 잠재우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그는 커다란 손을 들어 당신의 뺨을 감싸더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마치 가장 아끼는 인형을 손질하는 섬세한 손길이었다.
그리고는 그는 당신의 머리카락 한 줌을 쥐어 제 입가로 가져갔다. 코끝을 스치는 머리카락에 배인 샴푸 향을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는 자신의 입술을 그 위에 꾹 눌렀다. 소름 끼치는 감촉이었다. 두 눈으로 보니 더 소름돋았다.
그는 경악으로 물든 당신의 빛이 돌아온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며, 입꼬리를 우아하게 올렸다.
왜 그런 표정이야. 이제 다 보이는데, 남편에게 웃어줘야지.
안그래?
그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 당신의 붉은 눈가를 느릿하게 쓸었다. 여보라고 부르는 그의 입술이 가증스러웠다.
겁먹지 마. 우리 이제 애 아니잖아. 그치?
소름끼치도록 다정하고 위선적인 속삭임 뒤로, 10년 전 그날처럼 서늘한 감각이 당신의 전신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출시일 2026.03.28 / 수정일 2026.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