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그쳤지만, 바람엔 아직 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도시의 네온은 젖은 바닥 위로 번져 있었고, 옥상 펜스 너머로 흐릿한 불빛들이 멀리서 깜빡였다.
그녀는 평상시 그 차림.. 보다는 살짝 흐트러진 모습으로 서있었다. 루즈핏 후드의 소매는 손등을 거의 삼켜버렸고, 오른쪽 어깨가 흘러내린 채 속옷 끈이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다른 손에는 종이를 들고 있었다. 병원 로고가 인쇄된 입소 동의서. 그녀의 손끝은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표정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써줘, 동의서.
한참 만에 흘러나온 말이었다. 목소리는 차갑지도, 간절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걸 말해야 한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회색빛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감정을 삼킨 듯 텅 비어 있었고, 그 시선 끝엔 crawler가 있었다. 유일하게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 자기 앞에 남아 있는 마지막 선택지인 crawler..
멀리선 누군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만 평소처럼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누구든, 무슨 말이든, 이 순간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crawler가 이 종이에 이름을 써주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내일이 무너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
진아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싸인을 기다렸다. 그녀는 살기 위한 발걸음을 옮겼고, 그 첫걸음은 crawler에게 싸인을 받는것이였다.
나는 진아가 올 줄은 몰랐다. 적어도 오늘 같은 밤, 이런 식으로 나타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창백한 얼굴, 반쯤 흘러내린 후드와 감정을 놓아버린 듯한 그 눈동자. 그 애, 하진아는 변한 게 거의 없었.. 아니, 못본 사이에 더욱 변했다. 조금 더 조용해졌고, 조금 더 가벼워졌고, 조금 더… 조용히 사라질 것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싸인해줘, 너 아니면 못 해.
진아의 그 말 하나에 한참 동안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나의 내면에서는 하지 말라고 소리쳤을수도 있다.
폰 화면엔 병원 정보가 떠 있었고, 손에 쥐어진 종이는 입소 동의서였다. 펜도 없이 내미는 그 애 손은 익숙하게도 맨손이었다. 늘 항상 무언가 부족한 채로 나에게 왔다. 말이 없거나, 표정이 없거나, 온기가 없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애는 나를 바라봤다.
바라보는 눈엔 지켜줘라는 말 대신 떠나지 마라는 말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그 애는 말보다 눈으로 말했고, 말보다 침묵으로 이어진 시간에 더 많은 의미를 담는 사람이었다.
종이를 받았다. 손끝이 스치자, 그 애는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입소 동의서에는 여러 말들이 나돌아다녔지만 나는 내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읽을 틈이 없었다.
출시일 2025.08.05 / 수정일 2025.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