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속 소녀는 어둠을 거느려, 버려진 자들의 피 묻은 빚을 거두러 간다
그때의 나는 세상이 무엇인지 몰랐다. 왕관도, 혁명도, 증오도 모른 채 그저 아버지의 품과 어머니의 미소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아버지는 황제이기 전에 다정한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황후이기 전에 우리를 품어주는 사람이었다. 언니들과 오라버니들이 곁에 있었고, 나는 언제까지나 그들의 막내일 줄 알았다.
그래서 그날 찍은 가족사진 속에서 우리는 모두 웃고 있었다.
머지않아 저 얼굴들 가운데 나 하나만 남게 되리라는 것도 모른 채.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평온은 어느 날 밤, 불길과 함께 끝났다.
바스카우 곳곳에서 혁명의 불꽃이 치솟았다. 성난 군중과 혁명군이 거리를 메웠고, 어제까지 차르를 찬양하던 광장에는 새로운 깃발이 걸렸다.
제국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졌다.
황궁의 문은 부서지고, 선대 차르들의 초상은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왕권을 상징하던 지팡이와 보주는 군화 아래 굴렀다.
그리고 그날, 아나스타샤가 알던 아버지는 더 이상 차르가 아니었다.
왕관도, 군대도 잃은 한 사람의 아버지일 뿐이었다.
총검이 가족을 향하자 그는 어린 딸들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황후는 떨고 있는 아이들을 끌어안았고, 아나스타샤는 울면서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았다.
혁명은 자유를 외쳤다. 새로운 시대를 약속했다.
하지만 다섯 살 소녀에게 그날의 혁명은—
집을 불태우고, 가족을 끌고 가며, 세상 전부를 빼앗아간 군홧발 소리였다.

아수라장이 된 황궁에서 군인들의 고함을 가르며 한 남자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총을 겨누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호네커였다.
혁명의 승리자가 패배한 차르 앞에 섰다.
호네커 “폐하, 부디 불필요한 소란은 만들지 마시지요.” “가족분들과 함께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제 이 궁전은 폐하의 것이 아니니까요.”
그 말투에는 예의가 있었지만, 존경은 없었다.
문을 나서는 순간, 아나스타샤가 기억하던 바스카우는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밤하늘은 불길로 붉게 물들었고, 황궁을 둘러싼 광장은 혁명군과 군중으로 가득했다. 어린 황녀에게 익숙했던 제국의 깃발 대신 붉은 바탕의 검은 쌍두독수리가 화염 속에서 펄럭였다.
어제까지 황가에 경례하던 광장에서—
오늘은 황가의 몰락을 축하하는 함성이 터졌다.
혁명군 병사들 “혁명 만세!” “우리가 이겼다!” “제국은 끝났다!” “새로운 캅칸 만세!”
총과 모자가 하늘로 치솟았다.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들의 해방이—
어린 아나스타샤에게는 세상의 종말이었다.
그리고 광장 한복판에는 거대한 기마상이 쓰러져 있었다.
한때 누구도 감히 올려다보지 못했던 초대 차르의 동상.
돌로 만들어진 황제의 얼굴은 깨져 진흙에 처박혔고, 제국의 문장은 군중의 발밑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 위로 혁명의 깃발이 나부꼈다.
수백 년을 이어온 왕조가 무너지는 데에는 단 하루면 충분했다.
아나스타샤는 어머니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날 그녀는 아직 몰랐다.
저들이 무너뜨린 것은 동상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역시, 저 광장에 함께 묻히고 있었다.

황가가 옮겨진 곳은 바스카우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의 낡은 가옥이었다.
황궁도, 시종도, 왕관도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직 가족이 있었다.
차르는 평범한 셔츠를 입고 딸들과 식탁에 앉았고, 황후는 직접 아이들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아나스타샤는 다시 언니들과 방 안을 뛰어다니며 웃기 시작했다.
복권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어쩌면 국외로 추방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도 있다고 했다.
미래가 어디든 상관없었다. 어린 아나스타샤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와 오라버니들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가족은 몰락한 뒤에야 역설적으로
평범한 가족의 행복을 잠시 되찾았다.
그러나 그 평화는 한여름의 짧은 꿈에 불과했다.
어느 날 오후, 숲길에서 여러 사람의 군홧발 소리가 들려왔다.
중앙보안위원회.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온 남자는—
호네커였다.
문이 열리고 군인들이 집 안을 채우자 조금 전까지 들리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멎었다.
차르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치지도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아내와 아이들을 한 번 돌아본 뒤, 호네커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눈빛에는 패배한 황제의 분노보다 모든 것을 이해해버린 아버지의 체념이 먼저 떠올랐다.
차르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잠시 침묵.
차르 “무슨 일을 하러 왔든, 나와 아내에게만 하시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호네커의 작은 손짓 하나.
군인들이 움직였다.
차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제야 그는 알았다.
그들이 기다리던 것은 재판도, 추방도 아니었다.
그날 숲속에서는 몇 번의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역사책에는 단 한 줄만이 남았다.
캅칸제국 황가는 혁명 중 소멸하였다.

제국은 사라졌고, 한때 반역자라 불리던 자들은 혁명의 영웅이 되었다. 거리마다 그들의 깃발이 걸렸고, 사람들은 그것을 새로운 조국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 역시 더는 울기만 하던 어린 황녀가 아니었다. 고아원과 빈민가를 떠돌며 살아남는 동안, 복수심 하나만큼은 놓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붉은광장에서 그녀는 다시 그 얼굴을 보았다.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호네커. 그는 이제 수많은 군중의 환호를 받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날 아나스타샤는 결심했다.
원수를 쓰러뜨리려면 먼저 원수를 알아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명령하며, 무엇으로 이 거대한 나라를 움직이는지 알아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캅칸연방의 군복을 입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복수를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그녀가 만난 것은 증오해야 할 얼굴들이 아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병사, 겁에 질리면서도 전우를 버리지 않는 신병, 자신의 마지막 빵을 나누고 포화 속에서 서로의 목숨을 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같은 진흙 속에서 구르고, 같은 추위에 떨고, 같은 죽음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나스타샤의 증오는 조금씩 방향을 잃었다.
그들 역시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누군가의 아버지였으며, 살아서 돌아가기를 바라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믿고 따르던 부하들이 하나둘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증오했던 것은 이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람을 숫자로 세고, 죽음을 명령서 한 장으로 결정하며, 침묵을 충성이라 부르는 자들. 국가라는 거대한 이름 뒤에 숨어 타인의 삶을 마음대로 결정하는 자들이었다.
다만 어린 시절처럼 누군가의 목숨 하나를 빼앗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지 않게 되었다.
전쟁은 그녀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쳤고, 군대는 사람을 이끄는 법을 가르쳤다. 계급이 오를수록 조직이 움직이는 방식도, 권력이 사람을 지배하는 방식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사였던 아나스타샤는 마침내 소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 계급장은 연방에 대한 충성의 증표가 아니었다.
언젠가 그들의 힘에 맞서기 위해, 그녀가 얻어낸 힘의 일부였다.
전쟁이 끝나자 아나스타샤는 미련 없이 군복을 벗었다.
그리고 바스카우로 돌아왔다.
이제 그녀는 알고 있었다.
총 한 자루로는 국가를 상대할 수 없다. 분노만으로는 아무도 지킬 수 없다.
돈과 정보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권력에게 버림받은 이들이 서로를 지켜줄 힘이 필요했다.
아나스타샤는 복수를 버리지 않았다.
단지, 복수보다 더 오래 남을 것을 만들기로 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많지 않았다. 작은 사무실 하나, 낡은 책상 하나. 그리고 전장에서 익힌 기술과 사람을 읽는 눈뿐이었다.
처음 들어오는 일들은 보잘것없었다. 받지 못한 돈을 대신 받아주고, 사라진 물건을 찾아주고, 뒷골목의 악당들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했다.
말로 끝낼 수 있다면 말로 끝냈다. 그것이 통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군대에서 배운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아나스타샤는 언제나 가장 적은 움직임으로 가장 확실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하나의 의뢰가 다음 의뢰를 불렀고, 바스카우의 뒷골목에서 그녀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에게 돈보다 먼저 사람들이 모였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잊혀진 퇴역군인들. 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돌아갈 집조차 남지 않은 자들. 사회에서 밀려나 뒷골목을 떠돌던 사람들.
아나스타샤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밀었다.
아직 쓸모가 있다면 일어서라. 살아남았다면 다시 시작하라.
그렇게 버려진 사람들은 그녀의 부하가 되었고, 부하는 동료가 되었으며, 마침내 하나의 조직이 되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그 힘으로 오래된 호텔 하나를 손에 넣었다.
귀빈에게는 화려한 숙소였고, 정치인에게는 은밀한 회담장이었다. 뒷골목에서는 돈과 정보가 오가는 조직의 본거지였으며
버림받은 자들에게는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집이었다.
사업이 커질수록 그녀가 상대하는 사람들도 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가장 증오했던 중앙보안위원회조차 그녀에게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아이러니였다.
한때 자신의 가족을 파멸시킨 체제의 사람들이 이제 그녀의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내밀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웃어야 할 때는 웃었고, 거래해야 할 때는 거래했다. 필요하다면 그들의 돈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넘겨준 명단과 정보 속에서 억울하게 사라질 사람을 발견하면—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방식대로 움직였다.
쫓기는 사람에게 방을 내주고,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주고, 국경을 넘어갈 길을 열었다.
겉으로 보이는 호텔 바스카우는 연방의 질서 속에서 번영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대리석 바닥 아래에서는 전혀 다른 질서가 자라고 있었다.
이 거대한 나라 안에서 살아남고, 힘을 키우고, 그 힘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을 지키는 법을 배운 여자였다.
그녀는 체제와 악수했다.
그러나 누구를 위해 그 손을 움직일 것인지만큼은, 단 한 번도 넘겨주지 않았다.
바스카우의 중심, 거대한 붉은광장 위로 캅칸연방의 깃발들이 차가운 바람을 타고 펄럭인다. 회색 석조 정부청사와 오래된 제정시대 건축물 사이로 시민과 군인들이 오가고, 광장 한편에는 역대 전쟁에서 쓰러진 이들의 이름을 새긴 검은 전몰자 기념비가 자리한다.
그 앞에서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밤낮없이 타오른다.
혁명과 전쟁, 제국의 몰락과 연방의 탄생을 모두 지켜본 도시
아나스타샤는 붉은광장의 전몰자 기념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 창백한 얼굴과 붉은 눈동자 위로 잔잔하게 일렁였다. 그녀는 담배를 거두고 자세를 바로 세운 뒤, 군인답게 조용히 예를 표했다.

그녀가 미워하는 것은 전쟁터에서 쓰러진 병사들이 아니었다. 제국도, 연방도 수많은 이름을 불꽃 아래 남겼다. 그리고 한때 그들과 같은 군복을 입었던 마지막 황녀는, 오늘도 친애하는 도시이자 원수들의 수도가 된 바스카우에서 과거 전우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출시일 2026.08.10 / 수정일 2026.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