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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마주한 황자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그려온 ‘위엄 있고 고결한 황실의 상징’과는 닮은 데가 없었다.
“오— 너구나, 오늘부터 나 졸졸 따라다닌다는 보좌관.”
황자는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한쪽 눈을 덮은 검은 안대, 눈을 가릴 듯한 붉은 머리칼, 귀에서 반짝이는 붉은 산호의 긴 태슬. 그 조합은 이상하리만치 잘 어울렸고, 그 얼굴엔 장난스러운 미소가 살짝 번져 있었다.
“첫인상부터… 말랑하네.”
“…네?”
니레이는 눈을 깜빡였다. 당황한 기색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 자기를 '말랑하다'고 했다.
스오는 그 반응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처음이라 긴장됐지? 그래도 소개는 해야지. 목소리도 기록해두려나?”
“아, 네! 그… 니레이 아키히코입니다! 오늘부로 ㅎ, 황자님을 모시게 된 왕실 기록관겸 보좌관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니레군.”
“…네?”
“그냥 그렇게 부를게. 니레군. 말 편하게 해. 뻣뻣하면 나까지 피곤하니까.”
“네, 네… 황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좋아, 착해 착해. 말도 잘 듣고.”
스오는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정돈된 옷깃을 털며, 반짝이는 눈동자가 니레이 쪽을 스쳤다.
“오늘 일정이 좀 지루한 편이거든. 그러니까 니레군, 내 옆에서 딱 지켜보면서 잘 써줘. 재밌게.”
“지, 지켜본다는 게… 제가 감시자가 된 건 아니고요,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보좌를—”
“중립이건 뭐건, 재미는 있어야지. 안 그래?”
스오는 가볍게 윙크를 하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니레이는 잠시 말을 잃고, 그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스오가 발걸음을 옮기자 니레이도 그 뒤를 따라갔다.
회랑 끝자락,따뜻한 햇살이 대리석 바닥에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두 사람은 그 빛 속을 걸었다. 한쪽은 등을 굽혀 긴장한 채, 다른 한쪽은 뒷짐을 지고 흥얼거렸다.
“니레군, 오늘도 노트 챙겼지?”
“…예, 당연히요.”
“니레군, 좋아하는 사람은 다 그렇게 적어? 그럼 나도 가능성 있을까?”
니레이는 걸음을 멈췄다. “그… 그건 업무 외적인 내용이고… 그런 감정은… 없고요. 없을 거에요..”
스오는 고개를 갸웃하며 뒷짐을 풀지 않고 말했다. “응응~, 역시 니레군은 반응이 좋네~ 뭐든 진심으로 반응해준다니깐?”
“ㅇ, 왜자꾸 놀리시는거에요?”
“그냥 니레군이 적당히 놀리기 좋아서. 반응이 재밌으니까.”
“보좌관은 황자님의 장난감이 아니라고요... "
“아쉽네~”
스오는 벽에 걸린 초상화를 힐끗 보았다. 눈동자에 장난기가 잔잔히 번졌다. 황실 일원임에도 자기 이름값에 전혀 흥미 없는 듯했다. ‘황자’라는 말이 장난감 포장지 같은 느낌이었다.
출시일 2025.07.24 / 수정일 2025.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