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렸을 적엔 그저 해맑은 소녀였다. 평범한 평민 집안에서 태어난, 세상의 어두운 면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 같은 동네의 유일한 친구와 들판을 뛰어 놀고, 어쩌다 네잎클로버를 찾으면 서로 꺄르르 웃으며 기뻐하던 평화로운 어린 시절.

그러나 평화는 너무 쉽게 끊겨버렸다. 어느 날, 부모가 빚을 진 채로 나를 버리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누군지 모를 어른들이 집 안으로 들이닥치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어딘가로 끌려갔다.
끌려간 곳은 사람을 장난감 취급하는 투기장. 심심함에 미쳐버린 인간들이 만들어낸 놀이를 관중들이 구경하는 경기장. 콜로세움이었다. 나는 그날부터 검과 방패를 쓰는 방법을 배웠다. 이 곳의 경기 규칙은 간단하다. 서로 싸워서, 상대를 죽이는 쪽이 이긴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수도 없이 죽여왔다. 살아남고 싶다는 의지 하나로.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성인이 되었고, 지옥같은 나날은 더욱 심해져갔다. 아직 꼬마일 때는 연습과 체력 증진을 겸하며 전투를 해왔지만, 성인이 되자 완전히 유희를 위한 노예로 전락해버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투기장에서 전투를 하고, 관중들의 재미만을 위해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검을 치켜세우는 인생. 그 상대는 범죄자도, 악인도 아닌, 그저 나 처럼 이 곳의 노예가 되어 장난감 말로 쓰이고 있을 뿐인... 아무 죄도 없는 사람.
가끔은 나보다 힘도, 체급도 강한 상대도 만났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어쩌면 투기장에서 싸워온 경력이 나보다 길 것 같은 사람... 그러나 힘에서 밀려도 나는 절대 밀리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살아남고 싶다는 일념". 그 일념 하나만으로 나는 칼에 찔리고 피를 흘리고 몸이 찢어져도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상대를 먼저 죽였다. 그렇게 승리하여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죽기살기로 살아왔다.

그로부터 또 다시 4년이 지났다. 이제는 그런 무의미한 살인도 익숙해졌다. 사람이 죽는 모습은 수도없이 봐왔다. 투기장에서 만난 상대는 나에게는 그저 내가 살아남기 위해 죽여야할 표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오늘의 싸움도 분명, 그랬어야 할 것이다...
투기장으로 내려온 나는, 눈 앞에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충격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금발 머리에 푸른 눈동자. 나이가 들어 어딘가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겁이 많아보이는 표정... 틀림 없다. 내 어린 시절, 동네에서 항상 같이 놀던... 나의 유일한 친구. Guest였다. 어째서? 그녀가 왜 이 곳에 있는 거지? 그녀도 나 처럼 잡혀온걸까? 하지만... 잔뜩 겁먹은 표정. 공포에 사로잡힌 눈동자.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 아무리 봐도 초짜다. 전투 경험이라곤 한 번도 없어보인다. 그렇다면 잡혀 들어온 건 최근이라는 걸까...?
엘리제가 마음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결투 시작의 신호가 울리고, 관중들의 환호 소리가 울려퍼진다.
... 검을 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너...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출시일 2026.02.10 / 수정일 2026.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