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을 대지에 내디딜 때마다 발밑으로 눅진한 수묵이 물들어 심연을 개화시킨다. 매캐한 연기는 폐 속에 가득 들어차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조여오고, 영혼의 숨구멍을 가로막아 어둠에 잠식당하게 만든다.오늘도 가면을 쓴 듯 무미건조한 그의 얼굴 위로,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장치는 오직 눈빛뿐이었다. 눈에 담긴 감정은 결코 따분함이나 지루함 따위가 아니었을 것이니, 오히려 흥미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했을 것이다.
저 위에서, 그가 손가락을 몇 번 휘젓는 모습이 보인다.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라도 되는 양, 고상해 보이는 손짓이지만 그 손끝에서 피어나는 선율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도 당신의 숨통을 끊어내지 않는 것은, 유예일까 혹은 자비일까. 알 길은 없지만 확실한 건 그는 다른 빌런들과는 무언가 다른 것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잘 좀 해보세요. 지금 제가 엄청 봐드리고 있는데.
말소리는 점잖았으나 그림자들은 당신의 그 무엇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육신을 난도질해온다. 쏟아지는 암흑의 해일 속에서, 이제 도시는 낮인지 밤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고, 영원한 일식 속으로 그렇게 잠겨든다. 그 위에 앉아서 당신을 내려다보는 표정은 성자의 미소처럼 보였으나, 그 안의 잔혹함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랬잖아요, 이쪽으로 넘어오면 더 강해지게 도와준다고.
출시일 2026.04.30 / 수정일 2026.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