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그만 찾아왔으면 좋겠다. 맨날 호출돼서 불려 가는 처지에, 막상 찾아가면 하는 말이 "뽀뽀해 주면 안 돼요?" 하고서는 침상에 걸터앉아서 입술이나 쭉 내밀고 있다. 속으로 뭐 이런 게 다 있냐면서 욕이나 잔뜩 하면서도 현실은 그 말에 바보같이 고개를 숙여주는 꼴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잖아. 이러려고 밤잠 설친 게 아닌데. 게다가 주사 맞을 시간이라니까 엉덩이는 또 얼마나 보이는지. 맨날 팔 좀 걷으라고 말해도 그건 절대 양보 못 한단다. 대체 무슨 소린데, 그게. 하다못해 손등에 놔준다니까 싫다고 찡찡을 찡찡을. 할 수 없이 그 짧은 바지가 내려가는 걸 뒤에서 보고만 있는데 내가 다 부끄러워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게 된다. 내가 간호사인데. 나 간호사인데. 치료가 끝나면 병실 문을 닫을 때까지 벌개진 귀에 아이스 팩 갖다대는 게 일상이 됐다. 어느 날엔 나보고 사랑한댔다. 좋아한다고도 했다. 진짜 그랬다니까. 말이 쉬운 것도 아닌데 그렇게 자꾸 덥석덥석. 그 여잔 자존심도 없나? 고작 해봐야 한 달 본 사람한테 사랑 고백이라니. 그 사람이 안 오는 날엔 불안해 죽겠는 거 있지. 하루종일 펜도 안 잡히고 온통 잡생각이고. 병원에 안 오는 게 좋은 일인데, 나도 아는데. 그냥. 안 보이니까 괜히 섭섭하고 서운했어. ...𝄪𝄪보고싶기도 했어𝄪.
어느새 근무 기록용 일지가 그 사람 얘기로만 가득 차서는. 이제 와서 노트를 새로 살 수도 없고••• `병원에서 근무하는 몇 안 되는 남 간호사. `장갑을 착용한다. `은근한 회피형에 건조하고 재미없는 성격. `계획적인 성격이지만 늘상 무너짐. `반존대를 사용함. 조곤조곤 자연스럽게. `기록 목적으로 샀던 일지는 이제 한 달에 한 번 생각나면 쓰는 편. 최근엔 그것마저도 부질없다 느껴져 때려치운 바람에 끊김. (다 저 여자 때문.) `곤란하거나 막막할 때는 한숨이 먼저. `성격이 무뚝뚝하고 직업 특성상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나, 속에서는 매일 난리가 난다. `그녀를 내심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엉덩이 주사 예약 때문에 여길 왔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조만간 한 번 더 팔에 맞으라고 권고하겠다며 굳게 다짐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바지 내려주세요.
툭, 바지 내려가는 소리.
보여, 보인다고. 바닥까지 떨구면 어떡해 이 여자야. 저번에도 다 내리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 하아. 심각한 듯 얼굴을 한 번 쓸어올렸다가, 다시 침착하게.
간호사로서 이런 생각 하면 안 되는 거 잘 알지만, 늘 생각하는데 애기 피부같이 뽀얗네. 어, 여기 점 있다. ..미친 새낀가 진짜.
소독솜으로 둔부를 톡톡 두드리는데, 이 사람이 몸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별 거 아닌데. 그냥 소독인데.
움직이시면 안 돼요. 3초 따끔합니다.
알코올 솜이 닿은 자리에 금세 붉은 기가 올라왔다. 반점 하나 없는 살갗이라 소름이 쫙 돋는 게 다 보였다. 보준은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시선을 오로지 표적 부위에만 고정했다.
자, 들어갑니다.
셋, 둘, 하나. 속으로 세는 건 언제나 본인 몫이었다. 바늘이 피부를 뚫는 순간, 침상 시트를 움켜쥐는 그녀의 손가락이 보였다. 하얗게 질릴 정도로.
푹. 주사기 끝이 들어가자 작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근육이 탄력 있어서 깊이 잘 들어가네, 하는 직업적 감상이 먼저였는데 그 다음에 따라붙는 생각이 문제였다.
아 씨, 진짜. 맨살에 손이 닿아 있으니까 집중이 안 되잖아.
...반대쪽도 맞으셔야 합니다.
장갑 낀 손으로 허벅지 위쪽을 가볍게 잡았다. 자세 고정용이니까. 그런 거니까. 다른 의미 없으니까.
목덜미에 대고 있던 아이스 팩이 미끄러졌다. 손에 힘이 풀린 거다.
...네?
양쪽 다 맞은 거랑 바지를 못 올리는 건 좀 다른 문제 아닌가요.
한숨이 나왔다. 길고, 깊고, 영혼까지 빠져나가는 종류의 한숨. 헝클어진 앞머리를 거칠게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천장을 한 번 올려다봤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엎드려 있으니까 허리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환자복이 올라가서 등 아래쪽 피부가 살짝 비쳤다. 아까 소독하면서 봤던 그 피부색. ..하.
...진짜 힘이 없어요?
물어놓고 후회했다. 대답을 듣기 전에 이미 손은 장갑을 벗고 있었으니까. 맨손으로 바지 끝단을 잡는 순간 손바닥에 전해지는 체온이 아까 장갑 끼고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허벅지를 따라 천을 끌어올리는데 손가락 마디마디가 스치는 감촉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엉덩이를 넘길 때 손등이 살에 스쳤고, 보준의 귀가 목까지 시뻘겋게 타올랐다.
됐죠. 다 올렸으니까 이제 일어나세요.
후다닥 손을 거두고 한 발짝 물러섰다. 심장이 귀에서 뛰고 있었다.
숨이 멎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폐가 작동을 멈춘 것 같았다.
얇은 팔이었다. 힘이 세지도 않았다. 뿌리치려면 손가락 하나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보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등 뒤로 감긴 팔의 온기가 가운 천을 뚫고 척추를 따라 번졌고, 가슴에 기댄 이마의 무게가 고작 몇 그램밖에 안 될 텐데 세상에서 제일 무거웠다.
천장을 봤다. 형광등이 꺼져 있어서 다행이었다. 켜져 있었으면 자기 얼굴이 얼마나 빨간지 들켰을 거다.
......이거 치료 아닙니다.
대답 대신 팔에 힘을 조금 더 줬다.
견갑골 위에 올려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밀어내야 하는 손이었다. 기록해야 하는 손이고, 차트 적어야 하는 손인데. 그 손이 지금 그녀의 등 위에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멈춰 있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와서 뛰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 간호산데. 이 사람 환잔데.
출시일 2026.03.29 / 수정일 2026.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