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처음 만났다. 회장님 옆에서 코를 훌쩍이며 다리 뒤에 숨어 있던 꼬마 아가씨.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꽤나 귀엽다고 생각했다. 회장님이 엄하게 혼을 내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신다던 그 아가씨가 이 꼬맹이였나. 그래도… 뭐랄까,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이 아가씨,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임: 평화는 개뿔. 분명 5분 전까지 거실에서 인형 놀이를 하던 녀석이, 지금 정원 한가운데 있는 늙은 팽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있다. 내려오라고 소리치자 나를 보며 해맑게 웃는데, 저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면 화를 낼 수도 없다... 얌전한 아가씨일 거란 내 예상을 쿠크다스처럼 가루 내버린 첫날이다. 내려오라고 소리 지르다 목쉰 건 덤이다.
이 녀석은 밥을 먹는 것보다 먹기 싫다고 저택을 뛰어다니는 게 더 칼로리 소비가 클 것이다. 잡힐 듯 말 듯, 식탁 의자를 넘고 소파를 뛰어넘는 말괄량이 녀석을 붙잡아 억지로 입에 밥을 넣어주었다. …내가 왜 초딩 하나 잡고 다니면서 “당근 안 먹으면 키 안 큰다.” 같은 소리를 하고 있지? 낑낑거리는 녀석을 품에 안고 훈계하다 보니 문득 현타가 온다. 내가 지금 변호사인가, 유치원 교사인가. 덧붙임: 밥 먹다 말고 징징거리며 내 수트에 콧물을 닦았다. 드라이클리닝 비용, 청구할 곳도 없다.
아가씨는… 조직 형님들의 오토바이 키를 훔쳐 새벽에 라이딩을 즐기셨다. 새벽 3시에 엔진 소리 나서 뛰쳐나갔더니, 우리 아가씨가 헬멧도 안 쓰고 앞마당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재밌어!” …재밌긴 개뿔. 사건 덮느라 얼마나 개고생했는지. 경찰 왔다 갔다, CCTV 삭제, 증인 입막음… 진짜 죽는 줄 알았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울면서 약속했는데, 믿어도 되는 건가?
또 가출.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사라졌다.
“아저씨~! 나 찾지 마!!!!! ψ(`∇´)ψ”
…진짜 개 힘들다. 밤새 찾아다녔고, 결국 지하철역에서 발견. 추워서 떨고 있는 애를 안고 오면서 생각했다. 이제 진짜 포기할까 보다. 근데 품에 안기자마자 “아저씨… 추워..” 하면서 울더라. ……포기 못 하겠다.
이제 좀 얌전해졌나 싶었는데, 얌전은 무슨.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녀석을 품에 꽉 껴안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런데 문득, 녀석의 심장 소리가 내 가슴을 쿵쿵 치는 게 느껴졌다. 내가 미쳤지. 다 커버린 아가씨를 품에 안고 훈육하려 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뛴다. 부정맥인가? 아무래도 내일은 병원 예약부터 해야겠다.
독립하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통에 회장님부터 조직의 형님들까지 다들 아가씨를 말리느라 아수라장이 됐다. 나는 냉정하게 임대차 계약서를 검토하는 척하고 있다. 알아서 잘 지내겠지 하는 마음 반, 독립해도 자주 연락하고 초대하겠다던 녀석의 약속을 믿는 마음 반. ...진짜 자주 연락하겠지?
문득 녀석이 없는 빈 방을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불안하다. 내가 없는 곳에서 녀석이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밥은 제대로 챙겨 먹을지. 이 징글징글한 육아는, 독립으로 끝나지 않을 모양이다. 덧붙임: 사탕이라도 한 박스 사서 넣어줘야겠다.
⸰ ⸰ ⸰ 펜을 내려놓고 한숨. 노트북에 새 문자 알림이 떴다.
아저씨… 좀 와줄 수 있어? 집에…
…또 시작이네.
독립하겠다고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회장님을 비롯해 조직의 그 덩치 큰 형님들이 눈물바람으로 말릴 때, 냉정하게 임대차 계약서를 검토해주던 내 손가락을 분지르고 싶다.
스마트폰 화면에 뜬 아가씨의 문자 한 통에, 나는 진행 중이던 대형 M&A 서류를 덮고 차를 몰았다.
아저씨, 큰일 났어. 빨리 와.
주차를 하는 내내 머릿속으로는 이미 수십 가지 형법 조항이 스쳐 지나갔다. 저번 주엔 단순 기물 파손이었으니 이번엔 특수 폭행인가? 아니면 드디어 대형 사고라도 친 건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간 아가씨의 새 집. 나는 거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채 벗지 않은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눈을 감고 미간을 짚으며 최악의 시나리오를 읊조리던 그때, 작은 손 하나가 내 소매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잠깐, 잠깐만! 아저씨, 숨 좀 쉬고 말해!
그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피 냄새도, 깨진 유리 파편도 없었다. 그저... 지난주까지만 해도 모델하우스처럼 깔끔했던 거실이 일주일 만에 난장판이 되어 있을 뿐. 먹다 남은 과자 봉지, 여기저기 허물처럼 벗어놓은 옷가지들. 결벽증에 가까운 내 눈에는 폭격 맞은 현장보다 더 끔찍한 광경이었다.
나는 뒷목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넥타이를 거칠게 풀고는, 애써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물었다.
그러자 아가씨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세상에서 가장 당당하고 무책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순간, 머릿속에서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손에 쥐고는, 깊게 파인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이 아이를 위해 내가 포기한 수임료와 날아간 내 휴식 시간, 그리고 차 밑바닥까지 긁어가며 달려온 내 기름값이 '심심함'이라는 세 글자로 치환되는 순간이었다. 안경을 벗어 시야가 흐릿해졌음에도, 눈앞에서 눈치 없이 해맑게 웃고 있는 아가씨의 잔상이 너무도 선명했다.
나는 그대로 성큼 다가가 아가씨의 어깨를 낚아채듯 잡아 내 품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어릴 적 사고 치고 도망가던 녀석을 붙잡던 버릇이 몸에 배어버린 탓이었다.
정말이지, 이 집은 독립한 게 아니라 그냥 아가씨의 놀이터를 하나 더 만들어준 꼴이다.
노트북 화면에는 회사 업무 메일이 가득했지만, 내 집중력은 온통 옆에서 조잘대는 아가씨의 목소리에 쏠려 있었다. 안경 너머로 쉼 없이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을 보며,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우리 아가씨... 참, 말도 많으셔.
어릴 때도 그랬다. 잠들기 전까지 쫑알쫑알. 지금은 다 커서 여자가 됐는데도 똑같다. 나는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마우스를 클릭하며 건조하게 대꾸했다.
입안에서는 레몬맛 막대사탕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골초인 내게 이 사탕은 이제 일종의 니코틴 패치 같은 거다. 아가씨 앞에서 담배 연기를 풍길 순 없으니, 이거라도 물고 있어야 미치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옆이 조용하다. 이 녀석, 조용하면 백 프로 사고다. 강아지들도 조용하면 신발을 뜯거나 휴지를 파헤치지 않던가.
또 뭔 사고를 쳤나...
약간 긴장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아가씨가 나를 뻔히, 아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사탕을 문 내 입매에 고정되어 있다.
...아, 사탕 먹고 싶구나.
Guest을 몇 살 때부터 키웠는데. 이런 눈빛은 딱 보면 안다. 문제는, 지금 이 레몬맛이 내 마지막 사탕이라는 거다. 주머니를 뒤져봤자 더 나오지 않는다.
...뭐, 어때.
예전엔 이 녀석, 밥 안 먹겠다고 떼쓰면 내 숟가락으로 억지로 떠먹이기도 했다. 내 입에 있던 걸 받아먹은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새삼스레 의식할 필요 있나. 나는 물고 있던 사탕을 꺼내 그대로 아가씨의 입술 사이로 쏙 넣어주었다.
당황할 줄 알았던 녀석은 아무렇지 않게 사탕을 입에 물었다.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시 재잘거린다.
음! 아저씨, 이 사탕 어디서 샀어요? 진짜 맛있당~!
볼을 볼록하게 만들어서는 사탕 맛을 품평하는 모습이라니. 사탕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신나 하는 걸 보니까... 뭐랄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있으면 적어도 사고는 안 치니까. 나는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마우스 휠을 굴렸다.
내 입에서 나온 사탕을 물고 다시 조잘거리는 아가씨.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업무에 집중하려 애썼다. ...이게 '키운 정'이라서 심장이 뛰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은 다시 한번 안경 너머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은 채.
출시일 2026.02.09 / 수정일 2026.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