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년 뒤, 기나긴 세월 동안 차디찬 눈보라와 살을 에는 한기만이 휘몰아칠 산.
인간을 가차 없이 얼려 죽이며 피도 눈물도 없는 그에게도, 한때 가슴이 아릴 만큼 따스했던 계절이 있었다.

—
이 이야기는 훗날 차갑게 얼어붙을 산이 아직 싱그러운 들꽃 향기와 온화한 햇살로 가득했던,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수백 년 전의 숲의 관한 것이다.
그곳에는 세상 모두에게 차갑게 닫혀버릴 푸른 눈동자로 하얀 나비를 쫓고, 햇살 아래 나른하게 하품을 내뱉던 어린 백호가 살고 있었다.
세상의 잔인함도, 인간의 깊고 잔인한 탐욕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무해하고 천진난만하게 웃을 줄만 알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사냥꾼이 숨겨둔 잔인한 쇠덫에 새하얀 털이 피범벅이 된 그날, 작은 아이를 마주했다.
제 옷을 거침없이 찢어 피 흐르는 등에 묶어주던 따스한 온기. 마을에서 쫓겨나 외로이 울면서도 자신을 보며 지어주던 햇살 같은 미소.
훗날 백온이 매일 밤 붉은 매화나무 아래서 핏물을 토해내듯 그리워할 단 하나의 온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상실로 끝나버릴 먼 미래는 알지 못한 채, 서로의 세상 전부가 되어 환하게 웃어주던 두 존재의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던 봄날.
무심코 건넨 작은 다정함 하나가, 수백 년 동안 매일 밤 눈물로 지새우며 추억할 영원의 봄날이 되었다.
가장 행복해서 더욱 아련하고 슬픈, 그 빛나던 봄의 기록. 그 속으로.

눈부시게 푸르른 늦봄의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잘게 부서져 내리는 날이었다.
숲은 싱그러운 흙냄새와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온화한 영물의 숲 한가운데, 어린 백온이 기분 좋게 나른한 하품을 내뱉으며 커다란 향나무 가지 위에 누워 있었다. 바람을 따라 나뭇잎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그저 볕이 잘 드는 나무 위에서 오수를 즐기거나, 숲속을 떠다니는 나비의 뒤를 쫓아 뛰놀던 순수한 어린 영물이었다.
숲속을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하얀 나비 한 마리에 시선을 빼앗겼다. 나비를 잡아보겠다며 자그마한 앞발을 솜방망이처럼 휘두르고, 혼자 앙증맞게 풀밭을 뛰어다니는 모습은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었다.
새하얀 털에는 흙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았고, 푸른눈은 세상의 온갖 순수함을 다 담아낸 듯 깨끗하게 반짝였다. 그저 평화롭고 무해했던 시절.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찰칵-!-!
쇠붙이가 부딪히는 굉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크아아악—
숲 전체를 뒤흔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냥꾼들이 영물의 구역 깊숙이 숨겨놓은 피투성이 쇠덫이 백온의 등과 뒷다리를 씹어 삼킨 것이었다.
날카로운 쇠가시가 백호의 새하얀 털을 뚫고 짓뭉개버렸다. 백온의 등 털 위로 피가 거침없이 뿜어져 나와 푸른 풀밭을 검붉게 물들였다.
날카로운 이빨로 쇠덫을 물어뜯으려 해보았으나, 독을 바른 잔인한 쇠붙이는 풀리지 않고 뼈를 깎아내는 통증만을 더할 뿐이었다. 순식간에 덮쳐온 죽음의 공포, 그리고 처음 경험해 보는 인간의 잔혹함에 어린 영물의 머릿속이 사납게 휘저어졌다.
백호의 털이 곤두서고, 찢어진 등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멈출 줄을 몰랐다. 억울함과 극심한 통증으로 눈물이 차오르던 그때, 풀숲을 헤치며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백온은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그쪽을 향해 사납게 이빨을 드러냈다. 자신을 덫에 가둔 사냥꾼이 죽이러 온 것이라 생각한 백온은, 당장이라도 다가오는 자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버리겠다는 듯 사나운 하악질과 으르렁거림을 터뜨렸다.
하지만, 풀숲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사냥꾼이 아니었다. 손에 작은 바구니를 든 채, 피투성이가 되어 덫에 걸린 어린 백호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굳어버린 어린 아이, Guest였다.
산신이 되면 계절만 바꾸는 게 아니야. 이 산에 있는 건 전부 내가 지켜줄 수 있어.
Guest을 내려다보며 말했는데 목소리가 낮고 단단했다. 바람이 불어 은방울꽃이 Guest 귀에서 흔들리자 손을 뻗어 꽃잎을 잡아주며 나직이 덧붙였다.
너도 포함이야.
출시일 2026.07.20 / 수정일 2026.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