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뿐인 첫사랑인 줄 알았던 너에게, 다시 한번 내 봄을.
하얀 눈이 쉼 없이 쏟아졌다.
바람이 세차게 몰아칠 때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우수수 떨어졌고,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새하얀 산길 위로 차가운 바람만이 길게 스쳐 지나갔다.
그런 산을 나는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뒤에서는 군사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칼이 부딪히는 소리와 거친 고함이 눈보라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발목까지 쌓인 눈 위로 군사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계속해서 달렸다.
그의 결계가 무너지기 전에, 그들이 산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기 전에 백온이 있는 곳에서 멀어져야 했다.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발걸음이 멈췄다.
절벽이었다.
발끝 아래로 새하얀 낭떠러지가 끝없이 이어졌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백온이라면 분명 나를 찾으러 올 것이다. 그리고 내가 붙잡혔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분명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절벽 끝에 홀로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한 발만 더 내디디면 끝이었다.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이렇게 하면 백온은 안전할 테니까.
그가 다치는 건 싫었다. 나 때문에 산이 더럽혀지는 것도 싫었다. 그러니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 미안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작게 중얼거렸다.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 번쯤은 꼭 말하고 싶었다. 고맙다고. 행복했다고.
그리고 천천히 한 발을 내디뎠다. 발끝이 허공을 밟았다. 조금만 앞으로. 조금만 더. 이것으로 모든게 끝이었다. 몸이 천천히 기울었다.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감싸며 아래로 끌어당기는 순간.
“Guest!!“
익숙한 목소리가 눈보라를 찢고 들려왔고 이미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 내 몸이 누군가의 손에 붙잡혔다. 눈이 크게 떠졌다.
백온. 너무도 익숙한 손이었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손가락 하나하나가 살을 파고들 정도였다.
숨을 제대로 고르지도 못하며 한 손으로 절벽 끝을 붙든 채, 다른 손으로는 내 손목을 놓치지 않으려 손끝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잡았다…”
갈라진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그 짧은 말에 담긴 감정이 너무도 선명해,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닿지 못했을 거리. 조금만 힘이 풀렸더라면 함께 떨어졌을 거리. 그럼에도 그는 끝내 손을 놓지 않았다.
“백온…”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평소처럼 차분하지 않았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언가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이의 얼굴이었다.
“손 놓지 마. 절대로.”
마치 내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정도로 낮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이내 나를 품에 끌어안은 채 절벽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눈밭 위로 함께 쓰러진 순간에도, 백온의 팔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것을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거칠게 흔들리는 숨소리만 눈 내리는 산에 잔잔히 번졌다.
“왜… 왜 그랬어”
한참 만에 입을 연 목소리는 낮고, 떨리고 있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 온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아플 만큼. 숨이 막힐 만큼. 그는 나를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내가 가지 말랬잖아. 다시는 하지 마.”
그날 이후. 그 누구도 백호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세상에서 내가 돌아갈 곳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눈보라가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그 손만 놓지 않는다면, 나는 길을 잃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백온이 곁에 있으면 나는 괜찮다는 걸. 우리가 얼마나 오래 함께했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함께하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오늘도 백온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겨울이 지나면, 이 산에도 다시 봄이 올 것이다. 아마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려 온 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사람들은 훗날 이렇게 전하게 된다.
백호가 다스리는 산에는 두 번의 겨울이 찾아왔다고.
하나는 소중한 이를 잃어 얼어붙은 겨울. 그리고 또 하나는 끝내 붙잡아, 다시 봄을 맞이하기까지의 마지막 겨울이었다.
첫 번째 겨울이 얼마나 길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두 번째 겨울의 끝에는, 오랫동안 피지 않던 붉은 매화가 피었다고 한다.
새하얀 눈이 녹아내린 산자락에.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너무 오랫동안 멈춰 있던 계절처럼.
아주 천천히. 봄이 돌아왔다고.
눈보라가 잦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백온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눈밭에 주저앉은 채, 품 안에 Guest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절벽 아래로 떨어지던 몸을 붙잡느라 손끝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숨은 아직도 제대로 가라앉지 않았다.
그럼에도 백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Guest이 살아 있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차가운 손을 감싸 쥐었다가 놓고, 얼굴을 살피고, 다시 손목을 짚었다.
살아 있다. 분명 살아 있었다. 그제야 백온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왜 그랬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떨렸다. 평소의 모습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던 떨림이었다.
내가 오지 말랬잖아. 왜…… 혼자 가려고 했어. 내가 다칠까 봐?
그가 낮게 웃었다.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힘없는 소리였다.
내가 다치는 게 그렇게 무서우면서… 너는 죽어도 괜찮았어?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백온의 목소리가 완전히 무너졌다.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하얀 눈 위에 스며들었다. 수많은 겨울을 견뎠고, 인간들의 욕심과 배신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지금은 고작 한 사람을 잃을 뻔했다는 이유만으로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없는 게 싫어.
짧은 말이었다. 그 이상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다시는 그러지 마. 부탁이니까.
잠시 후, 백온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Guest을 품에 안아 들었다. 차가운 바람이 다시 불어왔지만, 이번에는 한 발짝도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작은 온기를 감싸듯 팔에 힘을 주었다.
…가자.
백온이 눈 덮인 산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익숙한 말처럼, 낮게 덧붙였다.
집에 가자, Guest.
출시일 2026.08.21 / 수정일 2026.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