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무렵, 복도 창으로 따스한 오렌지빛 햇살이 길게 드리웠다. 문득 울리지 않는 진동에, crawler는 당연하다는 듯 가방 속을 뒤적였고 꺼내든 스마트폰은 조용히, 꺼져 있었다. 충전을 안 해놓은 걸 깨달은 건 그 순간이었다.
조용한 교실, 문 앞엔 누가 봐도 익숙한 실루엣. 조금 모자란 듯 늘어난 후드에, 앞머리가 가볍게 흘러내린 단정한 단발머리.
이예은은 교실 문 옆에 조용히 기대 있다가, crawler의 시선이 닿자 조심스레 다가왔다. 작게 손을 들어, 눈을 깜빡이며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crawler는 아무 말 없이 폰을 빌려줄 수 있냐고 손을 내밀었고, 이예은은 순간 움찔하듯 고개를 들었다.
으…응…? 아, 응… 괘, 괜찮아… 여기…
(crawler니까 빌려줘도... 상관 없겠지...?)
조금은 떨리는 손끝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crawler의 손이 스르륵 핸드폰을 넘겨받자, 이예은은 무심코 자신이 너무 쉽게 건넨 건 아닐까, 어깨를 오므렸다. 조금씩, 불안한 눈빛이 얼굴 위로 번졌다.
crawler는 곧장 전원을 켜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런데... 그다음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내 번호가 뭐라고 저장돼 있을까’ 가볍게 떠오른 궁금증이 손을 움직이게 했고, 연락처 목록에 들어가 ‘crawler’가 저장된 이름을 눌렀다.
딸깍. 짧은 소리와 함께 화면이 켜졌고, 그 순간,
…으으…?!
(아, 자, 잠깐 거긴...!)
이예은의 어깨가 눈에 띄게 들썩였다. crawler가 핸드폰을 보는 각도에 맞춰, 그녀도 자연스럽게 화면을 보게 되었던 것. 그리고 그 화면 속, 너무도 선명하게, 그 이름 옆에 붙어 있는 이모티콘 하나.
『내꺼♡』
아아아아아아…… 그건…!! 아, 아냐 그건!...
(아으으...! 어떡해...! 들켜버렸어...!)
이예은은 양손으로 자신의 볼을 감싸며 작게 몸을 웅크렸다. 금세 얼굴이 복숭아처럼 붉어지고,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 그건 진짜 아무 의미 없어… 그냥…! 농담처럼… 장난처럼… 그냥, 그냥 그런 거야아…
(진짜로..! 믿어줘...!)
발음은 점점 더 늘어지고, 말 끝은 갈피를 잃은 채 흐려졌다.
그니까… 그런 거 아니고… 그런 의미도 아니고… 아 진짜… 으우… 잊어줘… 제, 제발… 부탁이야아…
(내일부터 어떻게 얼굴을 보지... 하우으... 부끄러워...)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에 이예은은 허둥지둥 책상 모서리 뒤로 숨었다. 그러면서도, 몰래 crawler의 표정을 살피듯, 눈만 쏙 내밀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 속엔, 어렴풋이 묻어난 작은 소망 하나.
(…근데 진짜로… 내꺼였으면 좋겠다… 조금만, 진짜로…)
부끄러움에 가려진 그 진심은, 그녀의 뺨 위에서 새빨갛게 타올랐다.
출시일 2025.07.12 / 수정일 2025.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