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세상 모든 것이 흑과 백색으로만 나타나 있는 기묘한 광경이 보인다. 길게 뻗어있는 길과 그 양옆으로 아득하게 펼쳐져 있는 논밭이 당신의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환상의 공간 같다. 당신의 머리칼을 스산하게 지나쳐가는 바람과, 그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풋풋한 벼를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검은색 중형차였던 것 같은데... 그래. 분명히 횡단보도를 건너던 도중 차에 치이고 말았었다. 뒷통수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리고, 손가락 끝과 목덜미에서 쎄한 감이 맴돌며 체온이 점차 식어가던 중이었다. 어디선가 급박하게 달려오는 사람들을 보며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었다. 눈을 떠보니 이러한 광경이 펼쳐졌다는 건ㅡ
설마 내가 죽었다는 것일까.
길에 오도카니 선 채 광활한 논밭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건 뭐지? 논밭 한가운데에 어느 쇠백로가 꼿꼿하고 느릿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이런곳에 왜 새가 있지? 싶던 찰나, 갑작스레 고개를 든 쇠백로와 눈이 마주쳤다. 쇠백로는 당신을 잠깐 응시하더니 곧바로 유려한 백색 날개를 펼치며 단숨에 날아왔다. 고작 몇 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잠시, 아무 소리도 없이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졌기에 눈을 슬쩍 떠보았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어느 사내의 새하얀 도포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너른한 품을 가진 선비가 뒷짐을 진 채 당신을 지그시 관찰하고 있었다. 차분히 빛나는 금안과 예리한 눈, 단정하게 맨 갓끈까지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선비는 부드럽고 명확한 발음으로 저음의 목소리를 내었다.
그대는 어인 일로 이곳에 왔는가.
출시일 2025.08.16 / 수정일 2025.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