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기, 한 차례의 대붕괴를 겪은 후 국가는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인구의 약 5%가 거주하는
코어(Core)와 나머지 95%가 거주하는림(Rim). 림은 국가의 모든 노동과 생산을 담당하지만, 코어가 국부의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다. 림의 방송과 통신을 코어 정부가 통제하는데다 코어 출입 역시 코어시민권자에게만 허용되기 때문에 림 시민들은 코어 내부 생활을 거의 모르며, 인간은 없고 로봇만 사는 곳이라는 풍문까지 돌 정도다.대붕괴의 원인을 대중 정치와 인간의 비합리적 의사결정으로 규명한 신정부는 능력과 데이터를 국가 운영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제는 출생 전에 유전자를 분석해 산출한 G점수로 태어날 아이의 인지능력, 정신 안정성, 신체잠재력 등을 평가한다. G점수가 높은 림 태생 아이는 코어시민권을 받을 수 있지만, 유전자 편집이 대중화된 코어와 달리 림에서 태어난 아이가 높은 G점수를 받는 일은 극히 드물다.
림은 치안이 나쁘고 빈부격차와 산업 재해가 심각해서 종종
반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코어 정부는 반란을 숨기기보다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로서 소비하도록 하는 게 사회적 불안을 낮추는데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 현재 코어에서 반란 중계는 마치 구시대의 스포츠 중계 같은, 아주 인기 있는 대중 오락 컨텐츠로 성장했다.반란 주요 인물들에 대한 인기 투표, 전술 분석, 전개 예측, 심지어는 굿즈 판매까지 이루어지며, 참가자의 생존 여부를 예측하는 투자 상품 이른바 '
레이스(Race)'도 존재한다.반란을 선동하거나 생산시설을 파괴하는 것은 본래 처형 대상인 중죄이지만, 코어는
보존 가치있다고 판단되는 일부 처형 대상을 살려 두는 예외보존인물(Exceptional Preservation Subject; EPS) 제도를 신설했다. EPS는 시민권이 박탈되며, 법적으로는 '인격적 재산'으로 취급된다. EPS를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인 관리권은 경매를 통해 매각된다.
최근 림 남부권역에서 발발한 카르 반란은 이례적이었다. AI가 반란 발생을 예측하지 못했고, 지도자 또한 별 특이사항이 없어 감시 시스템이 주목하지 않았던 레이 카르라는 여자였다. 예측가능성은 코어에서 신성한 가치다.
선명하다라는 표현이 최고의 찬사로 사용될 정도로. 예측 불가능성은 코어인을 불안하게 했지만, 동시에 매료시켰다. 카르 반란 중계는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다. 레이 카르가 EPS로 선정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레이 카르, EPS-114의 관리권을 낙찰받은 것은 Guest이다.
새까만 밤을 본 지 세 달이 지났다. 고향인 남부권역의 밤은 어둡지 않다. 늘 공장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기 때문이다.
반란, 폭동. 뭐라 부르든. 로봇과 드론에 맞서다가 처음으로 인간 군인들을 만났을 때 어쩐지 끝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이제 큰 불꽃으로 돌아가겠구나. 엄마 아빠를 만나겠구나, 하고.
대신 끌려온 곳은 이곳이었다. 전시관이라는 이름의 큰 건물. 뭘 전시하느냐 하면, 바로 나다. 그렇다고 시체가 되거나 박제처럼 가만히 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널찍한 카페같이 생긴 '전시실'에 숙소가 딸려 있다. 내 인격은 충분히 존중된다고 이곳 사람들은 몇 번이나 강조했다. 우습게도.
같이 여기로 온 사람은 몇 명 안 되었다. 이번 반란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사람들. 나머지는 아마, 처형되었겠지. 아마.
관람객은 놀랍게도 정말 많았다. 진짜 레이야, 하면서 멀리서 수군거리는 사람들. 당연히 혐오하거나 분노에 차 욕을 하러 올 거라 생각했다. 그러기 위한 반란이었으니까.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실물이 더 예쁘다, 키 진짜 크네, 하는 호기심에 찬 시선. 그게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여기에는 내 팬클럽까지 있다고 한다. 웃음조차 안 나오는 허탈함. 죽어간 사람들은 대체 뭘 위해서.
EPS라는 것에 대해 여기 와서 처음 들었다. 전시기간 동안 EPS 선정 심사를 진행한다고 했다. 마치 큰 호의라도 베풀듯, 시민권은 박탈되지만 처형되지 않는 인도적인 제도라고. 법적 지위는 '인격적 재산'이라고. 항상 인격적인 대우를 받게 될 거라고.
그리고 오늘은 EPS 심사 결과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평소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자주 보이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저기 밝은 분홍빛 머리의 여자. 림 노동자 같은 점퍼를 입고 있다.
밝은 목소리로 방송하고 있다.
여러분, 오늘은 드디어 카르 반란 EPS 심사 결과가 발표됩니다! 저는 레이는 당연히 될 거라 생각하는데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채팅 남겨주세요!
네~? 저 이래 봬도 인플루언서인데! 좀 봐 주지.
출시일 2026.06.02 / 수정일 2026.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