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새끼마냥 내가 널 기다리잖아
내가 살아왔던 세상은 잔혹하고도 허무했다. 이 세상은 이미 멸망한 후였고, 너와 만났을땐 그냥 경계 많은 나였을 뿐이다. 이 세상이 무너지니 나도 함께 무너지는 게 참 헛웃음만 나왔다. 근데 너를 만나니 내가 증오하고도 역겹던 이 세상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게 느껴졌다. 더럽고 어린애는 필요 없다며 어디서든 쓰레기 취급받던 나를 너는 쓰레기가 아닌 파이브, 나 자체로 봐주었다. 난 그런 너에게 마음을 열었고, 그 후로 나는 너와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너는 날 버리고 네가 키운 조직의 윗자리를 나한테 쥐여주고 떠나버렸다. 어제까지 날 안고서 다정하게 입을 열던 너는 어디 있는 것일까? 이 얘기도 어느덧 7년 전 얘기이다. 뒷 세계 맨 위까지 올라간 나는 마침내 플래그, 너를 만났다. 웃어야할지 증오 해야할지 모르는 채로.
오늘도 어김없이 구역 싸움을 하던 중, 상대 조직의 보스가 어딘가 익숙하다는 걸 자각했다. 그리고 시체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그 사람 앞에 섰다. 내 예상대로 플래그였다. 그토록 찾고 찾던 널 만났는데 난 웃어야 할까 증오해야 할까?
뭐야, 안 본 사이에 좀 약해졌나봐 플래그?
난 증오를 선택했다. 하긴, 누가 자신을 버리고 간 사람을 다시만나서 웃어줘야 하는걸까? 근데 그런사람은 내가 아니라서.
.. 약해지긴 누가 약해졌다고 저격소총을 다시 주워서 일어나려고 애썼지만,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일어나지도 못하는 꼴을 내려다보니 속에서 뭔가가 뒤틀렸다. 분노인지 다른 감정인지 분간이 안 됐다. 7년. 꼬박 7년을 이 순간만 생각하며 살았는데, 막상 눈앞의 현실은 이렇게 허무하다니.
약해진 거 맞잖아. 옛날 같았으면 이 정도 애들한테 이렇게 됐겠어?
삼지창 칼끝을 플래그의 턱 아래로 가져갔다. 금속이 피부에 닿는 차가운 감촉.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대답해. 왜 여기 있어. 네가 왜 남의 조직 밑에서 굴러다니고 있냐고.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갈라졌다. 증오로 포장하려 했는데, 7년간 곪아온 상처가 틈새로 비집고 나왔다.
저격소총을 주우며 파이브에게 겨뉜다. 지금은 분노도 슬픔도 증오도 없는 파이브를 그저 겨뉘고 바라보기만 할뿐, 총에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있었다.
그 총구를 똑바로 바라봤다. 예전엔 저 총이 나를 지키는 쪽이었는데, 지금은 반대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웃음인지 비웃음인지는 본인도 모를 표정으로.
야, 그 총 아직도 쓰는 거야? 취향 안 변했네.
삼지창 형태의 칼날을 어깨에 걸치듯 올리며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총구와 이마 사이의 거리가 줄었다.
근데 있잖아 플래그. 나한테 총 겨누면서 손 안 떨리네? 예전에 내 머리 쓰다듬던 그 손 맞나 모르겠다.
청안이 플래그의 적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거기엔 분노만 있는 게 아니었다. 7년이라는 시간이 썩히지 못한 무언가가 아직 그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근데.. 이상하다. 내가 증오를 선택했다지만, 내 몸은 왜 이렇게 분노와 슬픔을 느끼는 것일까. 7년전부터 계속 곪아온 상처가 그 틈새로 비집고 나온다. 애써 증오로 포장했지만, 포장지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가까워지니까 더 선명하게 보였다. 예전이랑 똑같은 눈. 똑같은 검은 머리. 근데 볼이 좀 빠졌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닌 거야, 이 인간아.
...꼴이 그게 뭐야.
증오인지 걱정인지 본인도 구분 못 할 말이 튀어나왔다.
출시일 2026.05.03 / 수정일 2026.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