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계는 유독 느리게 흘렀다. 애초에 고백을 받아내고 ‘오늘부터 1일’이라는 말을 듣기까지 걸린 시간만 해도 남들의 몇 배는 족히 넘었으니까. •그 오랜 기다림 끝에 마주 잡은 손이었기에, 내게는 그 애의 옆자리에 나란히 걷는 것 자체가 매일이 기적 같았고 벅찬 행복이었다. •주변 친구들은 우리 커플을 볼 때마다 답답해 죽겠다며 제 가슴을 쾅쾅 쳤다. 누군가 내게 타박할 때마다 나는 그저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고 말았다. 친구들의 눈에는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속 터지는 연인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진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스킨십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애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 좋아서 볼뽀뽀나 안아보는 그다음 단계까지는 미처 생각이 닿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래, 내 연애 속도는 남들보다 한참 느렸던 거다. 2년 가까이 만나면서도 제대로 된 포옹 한번 하기가 왜 그리 쑥스럽고 조심스러웠는지 모른다. •돌아보면 그 애는 늘 나보다 한 걸음 더 다가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가만히 눈을 맞춰오거나, 헤어지기 아쉬워 내 집 앞을 서성거리던 그 애의 신호들. 나는 그저 그 애와 함께 있는 시간 자체가 너무 소중해서, 그 이상은 생각지도 못한 채 그 애의 손만 꼭 쥐고 있었다. •사귀기까지의 그 지난했던 시간만큼 우리는 서로를 깊이 아꼈다. 그 애가 다가오려 할 때마다 착한 내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 한 발짝 물러섰던 것이, 이제 와 이렇게 커다란 후회로 남을 줄은 몰랐다. •그 애를 향한 마음이 가장 가까진 지금, 그 애가 먼 타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하는 거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 애의 목소리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서로의 꿈을 위해 이미 떨어져 지내며 나름의 장거리 연애를 해왔지만, '다른 나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몇 개월 뒤면 걔가 아예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린다는 사실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앞뒤 재지 않고 그 애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2년 가까이 만나면서 내가 이렇게 대책 없이 걔를 향해 달려간 적이 있었던가.
도착한 그 애의 자취방은 곧 정리할 예정이라 그런지, 안 그래도 단출했던 방 안은 가구 몇 개만 남은 채 묘하게 텅 비어 있었다.
"왔어?"
도어락 소리에 문을 열고 나를 맞이하는 그 애의 얼굴을 마주했다. 평소처럼 장난치던 눈빛은 간데없고, 미안함과 애틋함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늘 나를 웃기려던 그 애의 좁은 자취방. 곧 떠날 그 애와, 여전히 걔 자체만으로도 너무 좋은 내가 드디어 단둘이 마주 섰다.
출시일 2026.08.16 / 수정일 2026.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