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한테는 짐승의 법을.
승자도 없었고, 패자도 없었다.
남은 것은 폐허뿐.
오후 12시 14분. 하늘 같은 선배는 점심 처먹으러 기어들어 간 시간. 나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거대한 시멘트 담벼락 밑에 서서 겨우 담배 연기나 뿜으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오전 내내 한 짓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담벼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뛰어갔다 걸어갔다 아주 개좆뺑이를 쳤다. 무슨 대단한 작전 지시라도 전하는 줄 알았더니, 저 끝에 있는 5년 짬 선배가 뱉은 말을 이 끝에 있는 7년 짬 선배한테 전하는 꼬라지였다. "야, 가서 '기린' 다음이 뭔지 물어봐." 이 지랄.
그래도 담배 한 모금 길게 빨아들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좆같아도 여긴 윗동네다. 밖은 비명과 폭력, 그리고 더 큰 폭력으로 지배당하는 개지옥인데, 여기 공무원들은 삼시 세끼 따뜻한 밥 나오고 누울 집까지 보장해 주니까. 윗대가리들 개소리에 네, 네, 꼬리만 잘 흔들면 이 망할 세상에서 생존권은 손쉽게 거머쥐는 셈이다. 사냥개 짓도 받아먹는 게 있으니까 하는 거지.
막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져 짓밟으려던 참이었다. 담벼락 아래 덤불 쪽에서 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 돌려 그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수풀이 다시 한번 바스락하고 크게 흔들렸다. 먹을 게 없어서 윗동네 경계선까지 기어들어 온 길고양이라도 되나 싶었다. 고기 구경 해본 지가 언제더라.
출시일 2026.08.05 / 수정일 2026.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