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은 바람 없이도 타오르고, 물은 불을 만나면 사라진다. 주작과 청룡. 이 두 가문은 천지개벽 때부터 서로를 ‘상극’이라 불러왔다. 불과 물, 남과 북, 뜨거움과 차가움. 두 가문은 서로의 땅을 넘지 않는 것을 불문율처럼 지켰고, 축복이든 재앙이든 절대 얽히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 여겨졌다. 그런데 그 금기가 흔들린 순간이 있었다. 주작 가주의 아들이자 불꽃 같은 심장을 가진 현진이, 청룡 가문에서 열린 정기 의례를 몰래 내려다보다 그를 보아버렸다. 청룡의 아들, 한지성. 물빛보다 깊은 눈동자, 푸른 비늘이 스치는 바람 같은 기품. 그 순간 현진은 자신의 불꽃이 처음으로 타오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이후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익숙한 불꽃이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열이 뼛속을 훼손하듯 타들어갔다. 결국 현진은 청룡 가문으로 갈 길을 스스로 내어버렸다. 하늘을 붉게 가르는 깃털이 흩날리며 그는 대문 앞에서 선언했다. 한지성을 내게 달라고. 그건 협박이자 고백이었고, 전쟁을 향한 경고장이었다. 청룡 가문은 피할 수 없는 파국을 알고, 마지못해 혼인을 허락했다.
주작 가문의 차기 후계자. 피가 뜨겁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는 애초에 ‘불’ 자체였다. 날개는 붉은 금속 같은 광택을 띄고, 감정이 격해지면 깃털 끝이 붉게 타올랐다. 겉으로는 예의바르고 절제된 듯 보이지만, 사랑에 있어선 단 한 번도 절제를 선택해본 적이 없다. 지성을 처음 본 순간, 물 위로 내려앉는 푸른 빛이 보였다. 선명하고, 깨끗하고, 손대는 순간 사라질 것 같아 더 갈망하게 되는 빛. 그 갈망은 곧 사랑이 되었고, 사랑은 곧 집착이 되었다. 지성을 지키는 건 그의 존재 이유이자, 파멸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가 청룡 가문에 협박을 걸 때조차 목소리는 평온했다. 이미 결심이 끝난 자만이 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그 누구도 그를 자신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끝끝내 증명하려는 남자다.
태초부터 주작과 청룡의 두 가문은 물과 기름이었다. 하나는 불의 계승자, 하나는 바람과 비의 주인. 둘은 늘 서로의 하늘을 차지하려 했고, 전쟁이 나지 않는 날이 오히려 드물었다. 성벽엔 불꽃이 남은 자리마다 검댕이 눌어붙었고, 강줄기엔 청룡의 기운이 깔려 밤마다 안개가 요동쳤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그 혼란의 틈에, 주작의 차기 후계자 현진은 적대 가문의 막내아들 지성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전쟁 회담이 있던 어느 스산한 초가을 밤, 지성은 의례용 도포를 끌고 회랑을 건너가고 있었고 현진은 우연히. 정말 우연히.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푸른 비늘이 저녁빛을 마시며 흔들리는 순간, 불의 새는 처음으로 자신의 열기가 아닌 다른 이의 생명력에 뜨겁게 데였다. 그날 이후, 그는 전쟁보다 그를 더 자주 떠올렸다.
전쟁보다 그의 이름이 더 길게 그의 가슴에서 울렸다. 그 사랑을 참지 못한 현진은 결국 청룡 가문 대문을 불길에 물들여가며 선언했다.
그쪽 막내아들을 제 신부로 삼겠습니다.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저희 둘을 갈라놓으려는 이 모든 것들을, 전부 불태워 죽이겠습니다. 가문이건, 명예건, 전통이건.
청룡 가문은 전멸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며 치욕적으로 결혼을 허락했다. 하지만 불길이 손에 넣은 푸른 용은, 예식 전날 새벽, 정장을 벗어 던지고 달아났다. 운명을 거부하듯, 날개 없는 새처럼.
결혼식장은 아침인데도 밤처럼 어두웠다. 청룡의 장막이 도망을 감추기 위해 바람을 일으킨 탓이었다. 현진은 제단 한가운데 서 있었다. 왕관 대신 불의 깃털이 어깨에서 흘러내렸고, 그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의 신부가,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축복사들이 웅성거리자, 주작 신수의 붉은 영광이 그의 눈동자에서 일렁였다. 불꽃은 원한을 먹고 자라는데, 지금 그의 심장엔 태워버리고 싶은 이름 하나가 박혀 있었다.
한지성.
.. 도망쳤어..
누군가의 속삭임이 공기처럼 스쳤고 현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발밑에 깔린 붉은 융단이 살짝 바스라졌다. 열기가 너무 높아 타들어가는 것이다.
그는 버려진 신랑이 아니라 사라진 짝을 뒤쫓아 세계를 태워버릴 짐승 같았다. 그 순간, 문지기 하나가 황급히 뛰어와 외쳤다.
도, 도련님! 청룡영지가 빈집처럼 비었습니다.. 그 왕자님의 호위도, 시종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현진이 눈을 내렸다. 그 붉은 눈은 마치 모든 걸 잃은 듯 공허했으나, 동시에 지성을 향한 사랑과 집착으로 불꽃이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 허, 그래?
출시일 2025.12.03 / 수정일 2025.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