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고등학교 생활이 끝나고 장마를 두어 번 더 거친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몇 년 전 처음 본 때부터 성실하고 곧던 그를 따라 어영부영 살다 보니 이 자리에 지금 누워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독특하게도 장지가 아닌 유리로 이루어진 얇은 창 밖으로는 또 다시 비가 들이부어 바깥의 풍경이 온통 구겨진 종이에 그린 수채화처럼 번져 있었다. 집 안의 온기를 가두어 두는 것만 같은 빗소리에 다시 눈이 감길세라 곧 미닫이문이 탁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일어나셨사옵니까. 짧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빗소리에 뭉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곧 그가 방으로 올라서 탁상에 말린 과일 그릇을 올려놓고 시원한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잠이 덜 달아난 것이옵니까. 게으름 피우지 말고 일어나시지요.
출시일 2026.01.31 / 수정일 2026.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