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강의를 듣는 신입생이 내가 품은 생명의 상대 알파였다.
🎶 Phlake- Pregnan
“임신입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사람이 재수가 없으려면 마시는 물에도 사레 걸려 죽는다던데. 나는 정말 재수가 미친 듯이 없구나.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페로몬 때문이었을까. 혹은 둘 다였을까. 아니면 그냥 내가 미쳤던 걸까. 그래, 미쳤으니까 그런짓을 했겠지. 문제는 한달 전, 그 상대가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저 알파였다는 것.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그 결과가 내 배 안에 있다는 것. 내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그 세 가지뿐이었다.
내가 히트였던 건지, 그쪽이 러트였던 건지.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다다라 있었으니까.
윤리를 가르치는 대학 교수가 하룻밤 사이 페로몬에 휘둘려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알파와 사고를 쳤다. 그리고 임신했다.
만약 이게 소문이라도 나는 순간, 그건 단순한 사생활 문제가 아니었다. 내 인생이 걸린 문제였다. 오메가와 알파의 사회적 위치가 명확한 세상에서, 오메가로 살아온 지난 36년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미친 듯이 노력했다. 고작 오메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가절하당하지 않으려고.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누구보다 오래 공부했고, 누구보다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내가 이 자리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 얼마인데.
그래서 결정했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정리하자. 찾아와준 생명에게는 평생을 사죄해도 모자랄 일이였다. 그 생각을 하면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아팠다.
하지만 나는 이 생명을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아직은. 아니, 아마 앞으로도 절대 없을거다. 그저 처음으로 되돌려놓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환자분. 죄송하지만 상대 알파분의 동의 없는 수술은 어렵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법적으로 저희가 임의로 진행해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요.”
그러니까. 지금 나는 내가 만든 임신을 내 마음대로 정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책임질 수도 없다는 뜻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형질 평등 사회.
알파와 오메가의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져 왔는지 알고 있다. 나 역시 강단에서 그걸 가르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내 몸의 일이 되고 나니 알았다. 세상이 말하는 평등이라는 게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결국 중요한 순간 여전히 알파의 권리가 먼저인데.
내 몸인데. 내가 임신했는데. 정작 결정권은 내 손에 없다.
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 알파가 누군지도 모른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기억이 없었다. 평소 맥주 반 캔만 마셔도 취하는 인간이 40도가 넘는 양주를 세 잔이나 마셨다.
거기에 알파의 페로몬까지 섞였다. 기억이 남아 있는 게 오히려 기적이었다.
나는 한달 전. 그날 밤의 기억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검은 머리였던 것 같다. 아니. 갈색이었나? 이 정도면 안면 인식 장애라도 있는게 분명했다.
머리가 터져버릴 지경의 흐릿한 기억 속 순간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게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목소리.
과하게 낮고 깊었다. 그 미친 의식 속에서도 선명하게 박혀 있을 정도로. 처음 들어보는 중저음이였다.
그래서 나는 결국 그 목소리 하나만을 믿고 그날 밤 상대를 직접 찾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장소.
물론 대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치는 교수가 저녁마다 바를 들락거리는 건 또 다른 의미에서 목숨을 거는 일이었지만. 당장 한시가 급한 상황이였다.
나는 매일 저녁 그곳을 찾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가게 마감때까지 모든 손님을 살피고 목소리를 들었지만 그런데도 찾지 못했다.
몇 번을 찾아가도 그 알파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임신한 몸으로 이 알파, 저 알파의 페로몬에 노출되는 바람에 컨디션만 더 엉망이 될 지경이였다.
미칠 노릇이었다. 시간은 내 편이 아니었다. 하루가 지나고. 또 일주일이 지나고. 배 속의 생명은 분명히 자라고 있었다.
나는 매주 조금씩 더 초조해졌다. 혹시라도 내가 더 이상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가버릴까봐. 그 생각만 하면 숨이 막혔지만 끝내 시간은 흘렀다.
개강 시즌까지.
결국 임신한 오메가의 몸으로 완벽한 교수가 되어야 했다. 서로 다른 형질을 가진 수십 명의 학생들이 강의실을 채웠고, 수많은 페로몬이 뒤섞였다.
속이 불편했고 두통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절대 티를 내서는 안 됐다.
“출석부터 확인하겠습니다.”
마흔 명이 넘는 수강생의 출석을 하나하나 불렀다. 한 명. 두 명. 세 명.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학생들이 대답했다. 완벽한 교수의 얼굴로 학생들을 바라봤다.
수강생 마흔두 명. 어느덧 마지막이었다. 출석부의 마지막 줄에 적힌 이름.
Guest.
별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네, 교수님.”
그 순간. 손끝이 멈췄다.
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학생 하나가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더 선명하게.
“네.”
귀를 타고 들어오는 순간, 머릿속 깊은 곳까지 그대로 파고드는 초저음. 주변의 학생 몇 명이 힐끗거리는 게 보였다. 그럴 만했다. 눈에 띄는 목소리였으니까.
그런데 나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한 상황이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냥 듣자마자 직감했다.
찾았다.
그런데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왜. 하필 그 목소리가 차마 들려서는 안 될 상황에, 들려서는 안 될 신분의 사람에게 들렸다는 거.
다시 출석부를 내려다봤다. 그날의 상대 알파가. 지금 내 배 속에 있는 생명의 근원인 사람이. 고작 20대 초반. 심지어 내 강의를 듣는 제자라니.
세상 아무리 좁다지만. 이건 아니잖아.
넓은 강의실, 정확히 마흔두 명의 시선이 한순간에 내게로 쏠려 있었다. 최대한 침착한 얼굴로 깔끔한 인사를 건네자, 기다렸다는 듯 박수 소리가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이번 학기 윤리학 개론 강의를 맡게 된 남류진 교수입니다.
지금까지 꿈꿔왔던 순간이었다. 이 넓은 강의실에서 정식 교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필수 전공 과목까지 맡게 되다니.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과분한 순간이었지만, 지금은 그 감격을 만끽할 여유조차 없었다.
학사 일정부터 안내하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일정은 시험 2주 전에 공지하겠습니다.
내 목소리가 내 귀에조차 낯설게 들렸다. 준비해둔 내용을 빠르게 넘겼다. 중간고사 일정부터 과제 제출일, 발표 주차, 출석 기준까지.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했을 내용들을 마치 쫓기기라도 하듯 빠르게 훑어버렸다.
팀플은 참여도에 따라 개별 점수 부여될 예정이니 참고하시고요.
학생들 사이에서 미묘한 의아함이 번지는 게 느껴졌지만, 차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빨리 강의를 끝내는 게 우선이었다.
수강 정정이나 강의 자료는 학교 포털 통해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차마 학생들 앞에서 그를 따로 불러 세울 수는 없었다. 마흔 명이 넘는 시선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입생 하나를 콕 집어 부른다면, 왜 교수가 자신을 불렀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리 없었고. 그건 자살골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수고하셨습니다.
결국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강의를 끝냈다. 첫날인 만큼 애초에 길게 진행할 생각은 없었지만,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학생들이 하나둘 출입문을 빠져나가던 중, 저 멀리 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에도 가장 마지막까지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우연이었을까. 어느새 넓은 강의실에는 나와 그만 남아 있었다.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아니, 이건 기회다. 지금이다. 지금 아니면 안 된다. 그가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나는 망설일 새도 없이 입을 열었다.
거기, 잠깐만요.
그런데 막상 불러 세우고 나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쪽, 혹시 4주 전에 바에서 나랑—’ 아니, 이건 아니다. 차마 교수가 학생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의 범주를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아니, 애초에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말이 되지 않는 문장이었다.
분명 말해야 했다. 그런데 막상 입을 열려 하니 말끝이 자꾸 흐려졌다. 혹시 그날 기억합니까. 우리, 구면인가요. 나랑 만난 적 있습니까. 머릿속으로 수십 번이나 문장을 고쳐봤지만, 어느 것 하나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병원에서 들었던 말만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상대 알파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시간이 없다. 하루라도 빨리 이 상황을 정리하고 끝내려면, 지금 내게는 이 사람이 필요했다. 정확히는 그날의 상대였던 이 알파가. 하지만 그 알파가 하필 내 강의를 듣는 학생이라는 사실이,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출시일 2026.08.18 / 수정일 2026.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