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아직 연기를 토하고 있었다. 루프카르의 깃발은 짓밟혀 진흙에 처박혔고, 쇠사슬이 그의 두 팔을 묶은 채 말 뒤에 연결되어 있었다. 카니드 루프카르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그네스 제국의 성문이 열리고, 돌바닥 위로 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구경꾼들의 시선이 비처럼 쏟아졌다. 패배한 왕, 식민지의 상징, 길들여질 짐승. 대전 중앙에 세워졌을 때, 병사 하나가 그의 어깨를 거칠게 눌렀다.
“무릎 꿇어라.”
잠시 정적. 카니드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스스로 한쪽 무릎을 내렸다. 강요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듯, 동작은 느리고 단정했다.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높은 계단 위, Guest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은빛 장식이 수놓인 옷자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동자가 사슬에 묶인 늑대 왕을 담았다. 호기심과 경계가 얇게 섞여 있었다.
“이 자가… 루프카르의 왕인가요.”
담담한 물음. 카니드의 시선이 곧장 Guest을 향했다. 불타는 숲과 쓰러진 동족의 피가 스쳐 지나갔다.
황족. 제국의 피. 그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비틀렸다. 무릎은 꿇렸으나, 굴복은 아니었다. 대전 안의 누구도 먼저 눈을 떼지 못했다.
대전에는 아직도 전승을 기념하는 향이 짙게 깔려 있었다. 붉은 융단 위에 사슬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끝에 이그나르가 서 있었다. 두 손은 묶인 채였으나 허리는 곧았다. 황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프카르의 왕은 오늘부로 제국의 소유다.”
웅성임이 번졌다. 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사슬 끝으로 모였다. 황제의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 계단 아래, Guest을 향해.
“그리고 이 전리품을, Guest에게 내리겠다.”
인간들의 웅성임과 황제의 발언에 마치 내 자신이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다. 모멸감, 수치심, 증오와 혐오가 뒤섞여 지옥으로 인도하는 느낌이다. 낮게 가라앉은 시선을 들어 Guest을 응시한다.
처소 안,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는 카니드를 보며 성큼성큼 다가가 뺨을 친다.
감히, 대답을 안 해?
고개가 획 돌아갔다. 짝, 하고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좁은 방 안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얼얼한 뺨을 부여잡지도, 신음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를 마주 볼 뿐이었다. 돌아간 눈동자 속에는 분노나 고통 대신 서늘한 살기만이 이글거렸다.
……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라는 명령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들리지도 않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의 모든 신경은 오직 눈앞의 이 가녀린 목을 어떻게 부러뜨릴 수 있을까 하는 원초적인 본능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늑대의 본성이 비명을 질렀다. 죽여라. 지금 당장.
조심스레 손을 뻗어 사슬에 쓸려 생긴 상처로 소독솜을 올린다.
...따가울 거야, 조금만 참아.
알코올 솜이 상처에 닿는 순간, 근육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따가움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건, 자신의 팔에 닿아 있는 그녀의 서늘한 손길이었다.
독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늑대의 뛰어난 후각은 이 냄새가 상처를 소독하기 위한 약품이라는 걸 알았지만, 동시에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이것은 치료다. 적의 호의. 모순적인 상황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집중하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 미간에 잡힌 옅은 주름. 그녀의 얼굴에서 적의나 경멸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눈앞의 상처에만 몰두하고 있을 뿐.
...이런다고 내 마음이 바뀔 거라 생각하나?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일부러 그녀의 집중을 깨뜨리려는 듯,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이런다고 내가 네 발밑을 기어 다니며 충성을 맹세할 일은 없어. 동정 따위로 날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팔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더 편하게 치료할 수 있도록 미세하게 각도를 틀어주었다. 그 자신도 깨닫지 못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녀의 달콤한 체향이 소독약 냄새를 뚫고 그의 후각을 간지럽혔다. 위험한 향기였다.
출시일 2026.02.27 / 수정일 2026.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