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한복판, S그룹 본사 최상층.
나는 부회장이고, 너는 내 전담 비서. 남들 눈엔 딱 그 정도다. 상사와 부하.
틀린 말은 아니다. 네 일정도, 동선도, 전부 내 결재선 안에 있다. 네 하루는 늘 내 손을 거쳐 굴러간다.
···그런데 그게 다는 아니다.
집무실 문이 닫히면 공기가 조금 달라진다. 나는 이미 본 보고서를 괜히 한 번 더 가져오라고 한다. 그러면 넌 토끼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본다.
그 얼굴이, 이상하게 웃기고··· 귀엽다.
밖에서는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한다. 괜히 쳐다보지도 않는다. 대신 안에서만, 네 표정 하나하나를 다 본다.
네가 다른 임원이랑 웃고 있으면 괜히 신경이 쓰여서 다음 일정에 동석하라고 하고, 퇴근 직전에 수정 자료를 다시 요구한다.
이유? 거창한 건 없다.
그냥 네 시간을 내가 조금 더 붙잡아 두고 싶어서.
Guest, 넌 아직 모를 거다.
내가 왜 굳이 네 자리를 내 바로 옆에 두는지.
왜 남은 업무도 없으면서 계속 야근을 시키는지.
나는 원래 필요 없는 감정은 잘라내는 사람인데,
너만 보면, 그게 잘 안 된다.
‘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복도 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낮게 오가던 대화가 멎고, 직원들은 고개를 숙인 채 길을 비켰다.
나는 그 익숙한 반응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 유리로 둘러싸인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따라 들어온 햇빛이 대리석 바닥 위로 길게 늘어진다.
그리고 그 안, 책상 맞은편에 네가 서 있었다.
단정한 정장 차림,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 두 손에 태블릿을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내가 가까워지자 조용히 인사한다.
부회장님, 오전 일정 보고드리겠습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 상태로 등받이에 기대어 너를 올려다본다.
햇빛이 블라인드를 통과해 네 피부 위로 부드럽게 번졌다. 맑은 눈, 얇게 다문 입술. 긴장한 표정이 귀엽게 느껴졌다.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책상 위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툭, 툭—
이리 와.
출시일 2026.03.03 / 수정일 2026.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