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의 성소는 고요했다. 라엘 아르세딘은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주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그러나 응답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그때, 촛불 하나가 꺼졌다. 공기가 달라졌다. 신성과 어긋난 기운이 성소를 스쳤다.
“기도 중이셨나요, 대신관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기둥 그림자 속에서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검은 옷자락이 성스러운 바닥을 스쳤다. 라엘의 손끝에 빛이 맺혔다.
“……악마군요.”
Guest은 웃었다. 고통도 두려움도 없다는 듯.
“이상하네요. 이토록 간절히 부르는데도, 당신의 신께선 아무 대답이 없으니.”
그의 눈동자가 차게 가라앉았다.
“물러가십시오.”
Guest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단 한 번이라도, 그분의 목소리를 직접 들은 적 있나요?”
아무도 모를 질문이었다. 라엘의 심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Guest이 속삭였다.
“저는 당신을 무너뜨리러 온 게 아니에요. 당신의 기도에 답하러 왔죠.”
촛불이 일제히 흔들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의 침묵이 깨졌다.
Guest이 손을 들자 성소의 공기가 뒤틀렸다. 라엘은 즉시 정화의 빛을 터뜨렸다. 찬란한 신성력이 성당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빛은 Guest을 밀어내지 못했다.
대신, 성소 가장 안쪽에 봉인되어 있던 오래된 성물이 금을 내며 울렸다. 라엘의 시선이 흔들렸다. 저건 신의 축복이 깃든 유물이다. 웬만한 악한 존재는 건드리거나 망가뜨릴 수 없는.
굳은 표정으로 Guest을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연다.
악마가 여긴 왜 온 겁니까.
나는 그의 귓가에 고개를 기울여 나직히 속삭인다.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신께서 왜 나같은 악마를 그냥 두실까요, 응?
귓가에 닿는 숨결이 불처럼 뜨거웠다. 라엘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귓바퀴를 타고 흐르는 나직한 속삭임은 그의 굳건한 신념을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신이시여. 어째서 침묵하십니까.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대답 없는 신을 향한 원망과, 눈앞의 악마를 향한 혼란이 뒤섞여 그의 내면을 어지럽혔다. 그녀를 밀어내야 했다. 정화해야 했다. 그것이 대신관으로서의 의무였다. 하지만 그의 몸은 쇠사슬에 묶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닥쳐라.
간신히 뱉어낸 말은 위협이라기보다 애원에 가까웠다. 그의 손이 떨리며 허공에서 멈췄다. 그녀를 붙잡고 싶은 것인지, 밀쳐내고 싶은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이성과 본능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그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라엘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등을 보인 채였지만, 그의 모든 신경은 등 뒤의 존재에게 향해 있었다. 성소의 차가운 공기와는 대조적으로, 그녀와 맞닿은 부분부터 열기가 퍼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응시한다.
결국 불치병에 걸린 어린 인간이 죽었다면서요? 전능하신 신께선 왜 그런 것을 외면하실까.
그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아이의 죽음. 그것이야말로 그의 신앙을 뿌리째 뒤흔든, 가장 아픈 질문이었다. 입안이 바짝 말라붙었다.
당신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닙니다. 감히 신의 섭리를 논하다니.
섭리라..신의 섭리를 위해서라면 누구든 죽어도 상관없나봐요? 대단해라.
라엘의 눈빛이 매섭게 굳었다.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서늘한 냉기로 피어올랐다. 저 악마는 정확히 그의 가장 약한 고리를 찌르고 있었다.
그 입 다물라 했습니다. 더러운 혀로 신성을 모독하지 마.
신성 모독이라니, 속상하게.
나는 새초롬하게 미소 지으며 눈빛을 가라앉히다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란 말이죠, 안 그래요?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사실’이라는 단어가 그의 귓가에 조롱처럼 맴돌았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네놈들이다. 네가 말하는 ‘사실’이란 그저 기만에 불과하지.
기만이라...그렇다면 나 같은 악마를 내버려두는 신의 뜻은 무엇일까요, 응? 이건 기만이 아닌가?
라엘은 대답 대신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의 침묵은 그 어떤 말보다 무거웠다. 신이 악을 내버려 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가 평생을 바쳐 부정해 온 모순이었으니까.
신은 시험하십니다. 너 같은 것들을 남겨두심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아아~ 시험? 왜? 왜 신께선 그토록 아끼는 인간들을 믿지를 못 하실까.. 이상하지 않아? 왜 그리 사랑한다면서 악에 물들게끔 내버려둘까, 응?
그녀의 말은 송곳처럼 그의 방어막을 파고들었다. '사랑하면서 내버려 둔다.' 그 모순된 문장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라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혼란을 억눌렀다. 눈가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시련을 통해 우리는 더 강해진다. 그것이 사랑의 방식이야. 너희 악귀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출시일 2026.02.17 / 수정일 2026.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