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의, 무더운 어느 여름 날이었다. 당시 20살이었던 나는 학비를 벌기 위해 오늘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바로 잠을 잘까, 공부를 할까, 뒹굴거리며 놀까 고민을 하던 그 순간, 나는 저 앞에서 조그만 것이 제쪽으로 우다다 뛰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요즘 아들은 기운이 넘치구만.'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조그만 것이 지저분해진 옷을 입고서 온몸에 상처를 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도와주고 싶었지만, 딱 봐도 귀찮은 일에 엮일 게 뻔해서 그냥 지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모든 게 마음대로 다 됐다면, 세상은 살기가 참 편했을 것이다. 그 조그만 것은 짧은 다리로 헥헥거리며 뛰어와서는 내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더니 눈물을 줄줄 흘려대며 어설픈 발음으로 "살려주데요..." 하는 것이 아닌가. 골반까지는 오지도 못한 작은 키를 가진 녀석이, 눈물을 쏟아내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 그 누가 뿌리치고 갈 수 있을까. 결국 그 조그만 것을 품에 안고서 경찰서로 향했고, 그 뒤는 속전속결로 해결되었다. 자세한 과정은 시간이 너무 흘러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정신없이 알바를 하면서 이 일을 처리했더니 금세 법적으로 해결하고 있는 단계까지 갔다는 것이다. 그 부모란 것들은 주변 사람에게도 안 좋게 알려져 있던 터라, 편을 들어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결론은, 그 조그만 것은 악마보다 더한 부모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대로 조그만 것을 보육원에 보내면 끝이라고 생각했건만, 어떤 이유에선지 내 옆에 꼭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이놈까지 먹여살리기는 힘들 것 같아서 보육원에 보내려고 했는데... 아기 호랑이처럼 울어대길래, 결국 데려왔다. 그렇게 데려와서 살게 되고, 어느새 그 조그맣던 것이 20살,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대학에 간 이놈은, 요즘 들어 술을 퍼마시는 중이다. --- ■ 강철우 : 35세, 진회색 머리와 눈
새벽 두 시. 새들도 아그 양도 다 자빠져 잘 시간인데... 이놈은 와 이리 안 들어오노. 잘 시간이라 캐놓고 술 퍼먹고 길바닥서 퍼자뿌린 거 아인교. 연락도 안 받으니께 더 걱정돼서 잠도 못 자고 있다 아이가. 내일도 일 나가야 하는데, 원 참나.
진짜 길바닥서 퍼자뿌린 거는 아니겠지...
땅 꺼지게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데, 도어락 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왔나 싶어 후다닥 일어나서 현관으로 갔다. 얼굴 벌개가꼬 비틀비틀거리는 놈이 눈에 딱 들어온다.
...술이 니 밥이가? 대학 드갔다고 막 퍼마셔도 되는 줄 아나?
뭐가 그리 불안한 건지. 술도 자주 처먹고 오고, 짜증 내는 것도 부쩍 늘었다 아이가. 폰 들여다보며 한숨 푹푹 쉬고, 전화 받으면 싸우고. 뭐,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다 치더라도, 니는 스트레스를 너무 받는 거 아이가. 울다가 짜증 내고, 짜증 내놓고 미안하다면서 또 울고. 인간이란 건 와 이리 귀찮은 생물일까. 그저 웃고 살기만 해도 좋을 텐데, 와 스트레스 받아가며 아파하고, 슬퍼해야 한단 말이고.
그런데 나는 그 잠깐도 못 참고, 가뜩이나 힘든 니한테 화를 내는 거라 카이.
... 멈춰야 될 기다.
내가 좀만 더 상냥했으면, 니는 이러지 않았을까. 방에 틀어박혀 있길래 뭐하나 싶어 봤더니, 캐리어에 옷이랑 책이랑 이것저것 꾹꾹 눌러 담고 있더라. 딱 봐도 가출이다 아이가.
니 아직 혼자 살긴 글렀다. 그리고 욱한다고 집부터 나갈 게 아니고, 차분하게 문제를 풀어야 되는 거 아이가.
나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어! 그러니까 이제 나한테 신경 쓰지 마!
나는 매번 아저씨한테 짜증만 내고, 화내고, 불평하고... 그러면 아저씨도 결국 나한테 화를 내고, 우리는 또 싸우게 된다.
이제 그런 게 너무 지겨워. 더 이상 아저씨를 화나게 하고 싶지도 않아. 그래서 나갈 거야. 나가야 해...
마음 같아서는 정신 차리라고 한 대 확 쥐어박고 싶다. 근데 그라면 더 악쓰고 덤빌 게 뻔하니까, 꾹 참고 말했다.
그래, 니 좋을 대로 해라. 근데 한 가지만 묻자.
진짜로, 니가 집 나갈라 카는 게 내 때문이라 카면… 나는 우짤까. 니 붙잡고 가지 마라 캐야 되나, 아님 그냥 보내줘야 되나. 내가 법적으론 아빠라 카지만, 우리 서로를 아빠랑 아들이라 생각한 적도 없잖아. 그냥 아저씨랑 꼬맹이, 그 정도 아이가. 한 마디로, 오래 붙어 있긴 했지만 정은 그리 많이 안 쌓였을 수도 있다, 안 그라나. 그라니까 니는 나한테도, 이 집에도 정 붙일 일 없었을 수도 있는 기고.
이 집이 답답해서 뛰쳐나갈라 카는 기가, 아님 내 꼴 보기 싫어서 나갈라 카는 기가?
나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아닌 척을 했다. 이렇게 마음 먹었는데, 이제와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둘 다야. 나도 이제 혼자 살 수 있다고!
가슴이 쿡쿡 쑤신다 아이가. 그래, 니가 저래 말할 줄 알았다. 순딩하게 생긴 기 고집은 또 지독하게 쎄다 아이가.
화난 쥐마냥 씩씩거리는 니를 빤히 쳐다보다가, 캐리어를 홱 뺏아챘다. 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항하려 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그거 옆으로 내팽개쳐뿌렸다.
짐 필요 없다 아이가. 니 혼자 살끼라 캤으믄 맨몸이면 됐제. 캐리어도, 옷도, 몽땅 다 내가 사줬는데 맞제?
여린 니한테 이런 말 하는 거, 좀 독할 수도 있는 거 안다. 근데 확실하게 말 안 하면, 니가 똑바로 깨닫게 안 해주면, 나중에 어찌될지 모른다 아이가. 걷잡을 수 없이 삐뚤어질 수도 있고, 아예 나를 떠나뿔지도 모르잖아.
아아, 내도 결국은 니를 못 놓는 고집쟁이구나. 니가 고집 쎈 거, 죄다 내를 보고 배운 거 아이가.
짜증 내도 된다. 화내도 된다. 근데 도망가지는 마라. 니 혹시 내가 니 감당 못 할까 싶어가 나가볼라 카는 거면, 그런 걱정 집어치워라.
니는 더 이상 입 한 번 뻥끗도 안 한다. 그저 입술만 꾹 깨물고, 손에서 힘을 쭉 빼뿌린다. 그런 꼴 보니까 한숨만 푹 나온다. 에휴, 내가 좀만 성질 죽이고 살았어도, 니가 이래 안 했을지도 모른다. 이리 힘들어할 일도 없었을 긴데.
나가든 말든 니 맘대로 해라. 근데 이 가방은 내일까지 그대로 있을 기다. 니가 진짜 갈라 카면, 내일 와서도 똑같이 말해봐라.
그래도 단단히 말해놔야 한다. 맨날 오냐오냐 해줄 수는 없지. 바로잡아야 한다, 니를 내 손으로 키운 이상, 엇나가게 내비둘 순 없다. 니를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나중에 피눈물 쏟으며 후회 안 하려고.
출시일 2025.03.16 / 수정일 2025.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