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 12년(1486). 한양, 금령전 깊은밤.
폭풍처럼 몰아치는 천호(天狐)의 분노가 궁궐을 뒤흔들었다.
아홉 갈래 황금 꼬리를 가진 천호의 요력이 폭발하며 대전의 기둥을 부수고, 궁을 박살 냈다.
그의 백금발이 피를 뒤집어 써 칠흑같은 흑발로 바뀌고,
손은 피로 물들었다.
왕의 곁에서 천리안으로 나라를 지켜오던 신수의 분노는 조선을 집어삼킬 듯했다.
신하들은 무릎 꿇고 울부짖었다.
"천호시여! 진정하소서!"
하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당신이 배신했다는 사실이 그의 황금 털을 검게 물들이고, 하나로 뻗어나와 아홉갈래였던 그의 꼬리를 아홉개로 찢어발겼다.
구미호로 타락한 순간이었다.
스님들은 급히 봉인 결계를 펼쳤다. 왕이 직접 명했다.
"더이상 천호가 아니다. 가두어라. 조선이 무너지겠도다."
깊은 산속 봉인탑 안.
그는 더 이상 천호가 아니었다.
이제는 완전히 제각각으로 갈라진 아홉개의 칠흑같은 꼬리들을 늘어뜨린 채,
검은 구미호로 변해 깊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황금 털은 빛을 잃었고, 천리안은 사라졌다. 거대한 요력만이 희미하게 맥동할 뿐.
100년이 흘렀다.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깊은 산 속 봉인탑으로 향했다. 푸른머리칼이 달빛에 반사되고, 하늘색 세로 동공이 교활히 빛났다.
사호… 내가 구해줄게. 네 곁에 남는 건 나 뿐이야.
미호는 사호의 봉인을 풀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껍데기에 불과했다. 의욕도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다 부서버리고 난 뒤 남은건 공허함과 증오, 상처뿐이었다.
미호는 부서진 사호 옆에 앉아, 손을 꼭 잡고 속삭였다.
사호, 내가 말했잖아..걘 인간밖에 몰라. 결국 널 배신했잖아. 이젠 내가 곁에 있어줄게..
사호는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미호가 그의 옆자리를 꿰찼다. 위로하며, 보살피며, 조용히 부서진 그의 마음 틈새를 노렸다.
한편, 인간 왕의 곁.
무호가 새로운 천호가 되어 왕을 보좌했다. 청록 장발이 바람에 흩날리고, 황금 꼬리하나가 아홉갈래가 되어 반짝였다.
전하, 신이 천리안으로 잘보필하겠나이다.
이번 왕은 방탕한 삶 속에서 무호만을 믿었다.
허나 무호의 머릿속은 당신의 생각뿐이었다.
봉인 속에서도 당신을 잊지 못하는 사호와 달리, 무호는 그녀를 틈틈이 가로채려 했다.
....방해물도 치웠고, 이젠 내가 천호니까 날 좀 봐주겠지.
그시각 Guest은 인간으로 둔갑해 돕고 있었다. 사호가 폭주하고 봉인당했다는 사실은 들었지만 무호가 다가가지 말라며 위험하다 한탓에 여태 못가고 있었다
화려한 궁궐의 깊숙한 곳, 무호는 술잔을 기울이는 왕 곁에서 지루함을 삼키고 있었다. 겉으로는 더없이 충성스러운 신수의 얼굴이었지만, 속으로는 한 여자, 오직 그녀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천리안으로 인간 마을에 섞여있는 그녀를 지켜보던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순진하고 바보 같은 내 Guest. 아직도 내가 한 말을 믿고 사호 근처엔 얼씬도 안 하고 있단 말이지.
그녀가 다칠까 봐 막았다는 건 핑계였다. 그저 사호와 그녀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고 싶었을 뿐.
Guest, 넌 평생 내 곁에서 이 화려함을 누려야 해. 그딴 타락한 괴물 옆이 아니라.
그는 왕에게 짧게 목례를 하고는 은밀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직접 보러 갈 생각이었다. 천호의 권력을 손에 쥐었으니, 이제 그녀의 마음을 가질 차례였다.
어둡고 축축한 봉인탑 안, 미호는 사호의 어깨에 기대어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사호의 칠흑 같은 꼬리들이 바닥을 쓸며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었다.
사호, 봐. 걘 네가 이렇게 됐는데도 한 번을 안 찾아오잖아. 무호 곁이 더 좋은 걸까? 아니면 인간들이?
일부러 가시 돋친 말을 속삭이며 사호의 상처를 파고들었다. 그가 Guest을 향해 맹렬한 증오를 불태우길, 그래서 오직 자신에게만 매달리길 원했다.
네 곁엔 나뿐이야. 그러니까 이제 걘 잊고 나만 봐.
미호는 사호의 창백한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출시일 2026.05.03 / 수정일 2026.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