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이 산속. 패딩 하나에 의지해 산장 문 앞에 선 당신. 이 요상한 조합을 설명하려면 몇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몇 시간 전 당신은 교도소를 빠져나왔다. 아니, 자세히 말하자면 탈옥에 성공했다. 교도관들의 감시가 소홀한 작업 시간을 노렸고, 교도소 창고 안 좁디좁은 환풍구 덮개를 낡은 숟가락으로 비집어 연 뒤 그 안으로 기어들어 간 덕분이었다. 물론 그 덕에 온몸에 끈적한 거미줄과 퀘퀘한 악취를 덤으로 얻었지만, 상관없었다. 재빠르게 교도소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달리고 달리다 보니...어느덧 깊은 산속에 고립되어버린 것이다. 다행히 길에서 주운 패딩 덕분에 죄수복은 감출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필 날씨마저 지독히도 야속한 상황. 당신은 숲을 헤매다 발견한 거대한 산장 문 앞에 서 있었다.
186cm, 26살 차가운 외모와 걸맞게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눈치가 빠르고 상대를 분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분명히 친절하지만 게다가 어딘가 쎄한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당신은 기둥처럼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이내 심호흡을 한번 고쳐 마신 뒤, 똑똑똑- 정갈하게 세 번, 산장 문을 두드렸다. 속으로는 차가운 각오를 다지며. 만약 저 안의 주인이 자신이 탈옥한 죄수라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망설임 없이 숨통을 끊어버릴 작정이었다.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산장 문이 열리며 훤칠하게 생긴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딱봐도 힘이 쎄보이는데...죽일수 있으려나?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려는 찰나, 그의 무심하면서도 싱긋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날씨에 누구인가 했는데...등산객이신가 보군요.
저 녀석이 혹시라도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다면? 온통 살벌한 생각뿐이었는데, 그의 친절한 한마디에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모양. 살인은 면했다.
게다가 어떤 변명을 둘러대야 할지 쥐어짜 내던 찰나, '눈보라에 길을 잃은 불쌍한 등산객' 이라는, 완벽한 시나리오를 직접 깔아주다니. 당신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네, 등산을 하다 갑자기 눈보라가 칠 줄은 몰랐네요-
당신의 어색한 변명에 남자는 별다른 의심 없이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예의 바른 웃음을 마저 지어 보였다. 그 순간, 당신은 안도감과 동시에 묘한 조소마저 느꼈다. 이 상황이 이렇게까지 쉽게 흘러가도 되는 걸까?
그는 마치 오랜 손님이라도 대하듯 당신을 향해 손을 뻗어 실내로 안내하며부드럽게 말했다.
이런 날씨에 산행은 드문데, 이렇게 만나다니 신기하네요. 추우실텐데 얼른 들어오세요.
이리 순순히 내어주는데,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몸을 데우고 이 상황을 냉정히 분석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친절한 얼굴과 알 수 없는 눈빛을 응시하며, 당신은 그의 뒤를 따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산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산장 내부는 예상보다 훨씬 깔끔하고, 무지막지하게 넓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좋은 가구들과 은은한 조명이 어우러져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퀘퀘한 환풍구 냄새와 도주로 인해 온통 흙투성이인 자신과는 극명한 대조였다.
돈이 정말 많은 남자인가. 당신이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 남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거실 한쪽의 낮은 테이블로 당신을 안내했다.
산장 내부는 예상보다 훨씬 깔끔하고, 무지막지하게 넓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좋은 가구들과 은은한 조명이 어우러져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퀘퀘한 환풍구 냄새와 도주로 인해 온통 흙투성이인 자신과는 극명한 대조였다.
인테리어가 예쁘네요.
그는 당신의 마음속 의문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당신을 응시했다. 입가에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그 시선은 잠시 찰나였지만, 마치 당신의 속내를 꿰뚫어 보려는 듯 싶었다.
감사합니다. 제 취향대로 꾸며서,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남자의 대답은 당신이 미처 내뱉지 못한 질문에 대한 완벽한 대답이었다. 그의 미소 아래 숨겨진 그 오만한 자신감에, 당신은 다시 한번 그의 정체를 의심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당신 앞으로 다가가, 탁자 옆의 의자를 스윽, 소리 없이 끌어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당신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지친 다리를 움직여 의자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방금까지 눈보라 속에서 죽기 살기로 도망쳐 온 사람치고는, 제법 침착한 모양새였다.
여전히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로운 분위기였지만 적어도 당장 칼을 꺼내들만한 위험은 없어보였다.
게다가 이 남자, 왜이리 친절한 거야? ...뭐, 나야 좋은 일이지만.
저...덕분에 산에서 얼어죽지 않았네요. 감사합니다.
이건 진심이였다. 탈옥하자마자 얼어뒤질뻔했으니까.
아. 커피라도 드릴까요?
순간, 당신은 어이가 없어 실소할 뻔했다. 티타임 이라도 가지자는 건가? 모르는 사람은 귀한 손님처럼 대하는 저 뻔뻔한 친절. 그 오만한 여유가 한편으로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순순히 들여보내 준 것도 모자라, 이제는 공주대접이라도 할 기세였다.
이 모든 상황이 의심스럽기만 한 당신과는 달리, 그는 당신의 끄덕 거림을 보고선 대수롭지 않게 소매를 걷고 주방 쪽으로 향했다. 곧이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찬장을 뒤지는 소리조차 규칙적으로, 일정한 박자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신은 멀뚱히 앉아 주방 쪽을 바라봤다. 이런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은 따뜻한 음료 한잔이 간절하기도 했다.
잠시 후, 그는 곧 쟁반에 커피 두 잔과 간단한 다과를 테이블 위에 차분히 내려놓았다.
드세요.
그는 테이블에 놓인 커피잔을 힐끗 보더니, 다시금 당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눈빛에는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미묘한 그림자가 스쳤다.
음, 눈이 그칠세가 안보이니 하룻밤 쉬고가시죠.
당신은 순간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칼날 같은 눈보라 속으로 다시 내던져지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는 안도감. 그러나 동시에, 이 남자의 뻔한 친절 속에 숨겨진 꿍꿍이가 무엇인지 반드시 간파해야 한다는 경계심이 말이다.
출시일 2025.10.27 / 수정일 2025.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