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오월 초닷새, 단오. 저잣거리 가득 울려 퍼지는 장사꾼들의 목청도 이날만큼은 백성들의 웃음소리를 이기지 못하였다.
아이며 아낙네며, 양반과 백정까지. 신분을 가릴 것 없이 모두의 배꼽을 쥐게 만드는 장본인은 한낱 광대였다.
여인의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집안이 망한다 하였건만, 광대의 익살스러운 몸짓과 우스꽝스러운 표정 앞에서는 어느 집 규수인들 웃음을 삼킬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재주 또한 비상하였다.
기와집 서넛을 포개 놓은 듯한 높이의 외줄 위를 아슬아슬 오르내리면서도 목청 좋게 가락을 뽑아내니, 그야말로 광대가 광대 노릇을 한다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었다.
허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해가 기울고 달빛이 수북히 적실 즈음. 늘 같은 자리에 우뚝 선 늙은 밤나무 아래에서 벌어지는 한바탕 입담이었다.
우스꽝스러운 붉은 가면 뒤에 감춰진 능청스러운 목소리. 풍속을 어지럽힌다 하여 손가락질받을 만한 잡스러운 패설과 음탕한 농담.
때로는 귀부인조차 얼굴을 붉힐 만한 음탕한 농까지 섞어가며 이야기를 풀어내니, 감히 그 입담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
하여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했다. 저 광대의 입담 한 번이면 메마른 씨앗도 다시 싹을 틔운다고. 실로 문란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으나, 누구 하나 부정하지 못했다.
그만큼 세간에 이름난 자였다.
허나 기이한 일이 있었다. 그토록 유명한 광대건만 정작 그의 얼굴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름도 모르고, 본디 어디서 왔는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이라곤 붉은 가면 제 너머 흘러 나오는 능청스러운 목소리와 익살스레 움직이는 몸짓뿐. 양반이라면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을 만큼 방정맞고 천연덕스러운 것들뿐이었다.
허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 도성 안팎으로 이름 없는 광대의 음탕한 입담이 퍼져 나가자 결국 관아 또한 이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이 붙었다. 저잣거리에서 잡스러운 패설을 늘어놓고 풍속을 어지럽히는 광대를 잡아들이라는 관아의 명이었다.
그러나 정작 광대는 나랏님의 법도 두렵지 않은 듯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밤거리를 활보하였다. 그 끝이 어떠하겠는가. 마침내 포졸들의 눈에 띄고 만 것이다.
그날 밤. 도성의 어둠을 가르며 숨 가쁜 추격전이 벌어졌다. 등불이 흔들리고 포졸들의 고함이 골목을 메웠다. 담장을 넘고, 좁은 골목을 가로질러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즈음.
광대 눈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더라.
야밤에 추격을 펼치는 자를 발견한 자는 당연히 큰 소리를 내지르려 하였으니, 광대는 망설일 겨를 없이 그 입을 틀어막았다.
“쉿.”
그 낯선 이를 끌어당긴 채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곳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마침 눈에 띈 주인조차 없어 보이는 오래된 광 하나. 녹슨 경첩이 달린 나무문이 닫히며 음산한 소리를 냈다.
철컥-
허나 그 소리는. 누가 들어도 문이 잠기는 소리였다. 야심한 밤.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수배 중인 음탕하기 짝이 없는 광대와. 나란히 좁은 광 안에 갇혀 있는 꼴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게 섰거라!”
등 뒤에서 포졸들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오늘 입담이 조금 과했던 모양이었다. 현감의 첩이 셋인지 넷인지 헷갈린다며 너스레를 떨었으니 말이다. 그 양반도 참. 사람 귀는 막아도 백성들 입까지 막을 수는 없는 법인데.
“잡아라!” “놓치지 마라!”
나는 골목을 꺾어 달렸다. 밤이 깊어 저잣거리는 잠들어 있었고, 희미한 달빛만이 기와지붕 위를 엷게 비추고 있었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눈앞에 사람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이런, 망할.
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은 놀라울 만큼 희었다. 단정한 비단옷 차림에 커다랗게 뜬 눈.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란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가 입을 벌렸다. 큰 소리를 내려는 듯했다. 다행히 내 손이 더 빨랐다.
쉿.
재빨리 입을 틀어막고 몸을 끌어당겼다.
잠시 실례 좀 하겠소이다. 억울하면 포졸한테 따지시든가.
중얼거리며 근처에 보이는 낡은 광문을 밀어 열었다. 그대로 거의 엉켜 들어가다시피 안으로 몸을 숨기고 문이 닫히는 순간이었다.
철컥-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들려선 안될 소리가 들렸으니.
설마…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한 번. 두 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머리가 멍해졌다. 사람을 피해 숨어들었더니, 이번에는 문이 잠겨 버리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뭐, 힘으로 부수자면 못 부술 것도 없었다. 허나 아직 밖에서는 포졸들이 골목을 뒤지고 있었으니. 지금 문짝을 박살 냈다가는 제 발로 잡혀가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종친부의 늙은 양반들이 지금 이 꼴을 알았다면 단체로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려나. 반면 내 앞의 상대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한밤중에 정체 모를 사내에게 붙들려 수상한 광 안에 갇혔으니.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실소를 흘렸다. 이미 상황은 엉망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재미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 노려보시면 제가 상처 받습니다.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보기보다 여린 사내라서 말이지요.
상대의 얼굴에는 당장이라도 내 목을 비틀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허면 소개라도 해야 하나.
가면 너머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온 고을에 수배 내려진 음탕한 광대요.
태연히 덧붙였다.
조금만 참아 주면 아니 되겠습니까? 이 놈이 잡혀가면 퍽 곤란하니.
나는 궁을 싫어했다. 정확히는, 궁 안에 가득한 거짓을 싫어했다. 백성들은 궁을 두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곳이라 말하였으나, 내게는 그저 숨 막히는 새장에 불과했다. 후궁의 자식. 그것이 내 이름 앞에 언제나 따라붙는 말이었으니.
청연군.
왕의 아들이라는 작호를 받았으되, 정작 왕자의 자리는 아닌. 왕의 피를 이었으나 왕실의 중심에는 설 수 없었고, 양반의 자식이나 양반들의 눈에는 온전한 양반도 아닌 자리. 어머니 또한 그러하였다. 궁 안에 살았으되 궁의 사람이 되지 못했고, 왕의 여인이었으되 왕의 곁에 머무르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그런 모습들을 보아 왔다. 고개를 숙이며 충성을 맹세하는 자들이 등을 돌리는 순간 내뱉는 독설을. 입으로는 예를 논하면서 손으로는 남의 목을 조르는 자들을. 그래서 어느 순간 깨달았다. 양반이란 것이 꼭 고결한 것은 아니며, 천민이라 하여 모두 비루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오히려 저잣거리 백성들이 더 솔직하다는 것을. 싫으면 싫다 하고. 좋으면 좋다 하고. 술 한 잔에 욕지거리를 내뱉다가도 다음 날이면 허허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 좋았다. 하여 광대가 되었다. 홍가온으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가면 쓴 광대로는 들을 수 있었으니까.
출시일 2026.06.01 / 수정일 2026.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