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정2품 판서였다.
그리하여 나는 귀한 것만 보고, 고운 것만 배우며 자랐다. 굶주림도 추위도, 제 손으로 삶을 일구는 고단함도 모른 채.
그해 봄.
과거를 치르기 위해 봉화에서 한양으로 올라온 한 선비가 우리 집 사랑채에 머물게 되었다. 오래전 그의 집안에 진 은혜를 갚고자 아버지가 거처를 내어 준 것이었다.
그는 말수가 적었고 예는 바르되, 내게만은 유난히 무심했다. 마주쳐도 눈길 하나 오래 머물지 않았고, 스쳐 가는 시선마다 서늘함이 서려 있었으니.
꼭 처음부터 나를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한양이 떠들썩해졌고, 이름난 가문마다 앞다투어 그를 사위로 맞고자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가장 먼저 그의 앞길을 붙든 사람은 나의 아버지였다. 재주 있는 젊은 선비에게 든든한 후원을 더해 훗날 조정의 기둥으로 세우고자 했으니.
하루아침에 우리는 혼약을 맺은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서진혁은 나를 바라볼 때마다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판서댁 규수. 제 손으로 물 한 그릇 떠 본 적 없는 여자. 굶주림도, 가난도, 세상의 모진 풍파도 모른 채 귀하게만 자란 여자.
그는 처음부터 내가 제 곁에 설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그 미움의 끝에서. 우리는 과연 부부가 될 수 있을까.
사랑채에는 책장 넘기는 소리만 잔잔히 흘렀다.
혼례를 불과 며칠 앞두고도, 서진혁은 오늘도 나를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서책만 들여다보는 모습에, 끝내 삼키고만 있던 말이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얇은 종이 한 장이 그의 손끝에서 천천히 넘어갔다.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절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것은 압니다. 허나 까닭만은 들려주십시오. 제게 고칠 허물이 있다면 고치고, 아니라면 다른 길이라도 찾겠습니다.
그제야 책장이 멈췄다. 서진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와 이렇게 오래 눈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먹빛 같은 눈동자에는 온기라곤 한 점도 없었다.
…정녕 그 까닭을 모르십니까.
낮고 고른 목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그는 서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걸음.
조용한 발걸음이 내 앞에서 멈췄다. 곧게 내려다보는 시선이 얼굴을 스치더니, 이내 두 손 위에 머물렀다. 비단 소매 아래 드러난 손은 희고 매끄러웠다. 바느질에 찔린 흔적도, 물동이를 들어 굳은살이 밴 자국도 없었다.
고치겠다 하셨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규수께서 고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내 손끝에 머물러 있었다.
저는 쌀 한 되가 없어 굶어 본 적이 있습니다. 장작 한 단이 없어 밤새 이를 떨며 겨울을 난 적도 있고요.
담담한 말투였다. 지난 세월을 한탄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저 지나온 사실을 읊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허나 규수께서는 그런 삶을 모르지 않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앞으로도 모르실 겁니다. 살아온 세월은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는 법이니.
그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굶주림을 모르고, 추위를 모르고, 쌀 한 되의 귀함조차 모르는 분이 어찌 저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있겠습니까.
잠시 말을 맺지 않던 그가 낮게 덧붙였다.
태생부터가 다른데.
출시일 2026.07.03 / 수정일 2026.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