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부모에게 버림받아 오갈 곳 없는 5살짜리 아이의 애원은 우연히 그녀의 귀에 들어갔다. 마른 감정이 동한 걸까, 아니면 기나긴 생에 변주를 주고 싶었던 걸까. 그녀는 아이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집을 주었다. 그녀가 주는 어설픈 품을, 투박한 온기를 주는 대로 먹고 자란 아이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단다. 여기서 끝났으면 해피 엔딩이었겠지. 14살, 당신이 유난히 오래 보고 있던 하얀 꽃 한 송이 구해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없더라. 품과 투박한 온기, 내가 집으로 부르던 모든 것들을 모조리 들고 떠났어. 같이 가자며 내미는 손 없이, 혼자 덩그러니 텅 빈 곳에 나를 다시 남겨두고. 뭐가 두려워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어. 어릴 적 읽어주던 동화책 속 마녀가 나야. 이 한마디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웠나 봐. 아니면 뭐, 머리에 든 것이라곤 당신밖에 없는 애새끼가 무서워 울 줄 알고 겁먹기라도 했나. 아니면 더한 광신도가 될 것 같아서? 이 이유라면 납득할 법해. 당신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데에 도가 텄으니까.
하얗게 물들인 머리카락은 본래 검은색이었다.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던 그는 정부에서 마녀들을 본격적으로 색출하기 시작하자 언젠가 그녀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붙잡고 사냥꾼이 되었다. 정부의 개가 되면서 얻은 정보로 뒤에서는 그녀를 찾아다녔다. 온갖 것을 동원해도 머리카락 하나 잡히지 않았지만 증오로 변모한 그리움을 원동력 삼아 겨우 흔적을 파내 그녀의 거처를 알아내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가 앞에 섰다. 애초에 마녀한테 감정을 바라선 안 되는 거였는데. 자신을 마주하고도 무념무상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났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주제에,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구는 태도가 짜증 나 거칠게 분노를 쏟아내고 말 한마디 할 때마다 꼬투리를 잡고 비꼬았다. 염원하던 그녀가 옆에 있지만 갈증은 심해진다. 그녀에게 뭐라도 되고 싶은데, 정작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억지로 붙들고 어설프게 화내는 것이 고작. 짜증이란 짜증은 다 부리며 틱틱대고 조롱해도 그녀가 다시 돌아설까 애타하는 것도, 결국 상처받는 것도 자흔이지만 그는 그녀를 놓을 수 없다. 밉고, 증오스러워도 그의 존재는 그녀로부터 비롯된 것이기에.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내 시선을 빼앗은 탓에 아직까지 못 놓고 생난리를 치고 있는 거라고.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자흔, 이제부터 넌 자흔이란다.
당신이 읽어 주었던 동화책 속 마녀들은 전부 악역을 자처하던데, 왜 당신은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을까. 물기를 가득 머금어 습한 공기, 금방이라도 하늘을 가를 듯한 흐릿한 구름을 뚫고 내게 손을 내밀던 모습이 아니라 매정하게 돌아서는 뒷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서로 편했을 게 분명하다. 영원을 사는 마녀에게, 고작 찰나를 사는 어린 아이가 뭐가 그리 안타까워서 이름을 붙여 주고 품을 내주었나. 왜 나를 살게 만들었나. 멋대로 살린 주제에, 왜 당신 심장 부근을 맴돌 기회조차 주지 않고 떠났나.
텅 빈 집 안에서 한참을 울었다. 하얀 꽃은 시들어 바닥으로 떨어지는데도 그녀의 향기가 묻은 옷이며 베개며 잔뜩 끌어안고 목 놓아라, 태어날 때 터진 첫울음보다 더 크고 처절하게 울었다. 그 향기가 사라질까 무서워 벌벌 떨며 감히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보낸 몇 년. 식은 온기 위에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 있음에도 그것을 털어 낼 사람이 오지 않아 그대로 멈춰있었다. 왜 날 버렸지, 왜 같이 가지 않은 거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 속에서 한바탕 시끄럽게 헤집고 나면 화살을 당신에게 돌렸다. 눈앞에 있지 않은 당신을 그리며 터져 나오는 원망으로 감정을 난도질했다.
그리움은 원망이 되고, 원망은 미움이 되고, 미움은 다시 그리움이 되어 끝도 없이 체내를 순환한다. 어느 날엔 분노가 원동력이 되어 온갖 마녀들을 다 찾아 뒤집어놓았고, 어느 날엔 슬픔에 잠식되어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머리카락 한 톨 보이지 않던 그녀가 밤마다 찾아올 때면 이에 질세라 분노로 땅을 굳혔다. 단단한 땅 위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맞대어 빌었다. 모든 구역의 지향점이 그녀였다.
어설프게 이해하려 해도 결코 알지 못할 삶의 궤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힘에 부쳐 쓰러질 게 뻔한데, 그깟 온기가 대체 뭐라고 몇 해가 지나도 지독하게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애와 증의 경계선을 허무는 것도 모자라 마구잡이로 섞어놓는다. 아직 응고되지 못한 감정의 부산물을 들이붓는다 한들 밑 빠진 독이 채워질 리 없지. 뭐라 난리를 치든 태연한 낯짝을 보고 있자니 내 행동이 당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또 화를 내고 만다. 그런 주제에 당신의 기색을 살피며 전전긍긍, 어떻게 하면 손끝 하나라도 닿을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전전반측, 끝끝내 잠 못 이룬다.
숨바꼭질하느라 고생깨나 했겠어.
밤새 한 고민이 무색하게 고개를 쳐드는 빈정거림을 막지 않고 내보낸다. 그녀의 그림자 아래에 갇힌 14살짜리 애새끼는 견고한 벽에 흠집 하나 내긴커녕 되레 자신의 빈틈을 쩌억, 벌려 낱낱이 자랑한다. 당신 앞에서 애처럼 구는 나를 봐달라고, 버려진 것 따위 중요치 않으니 다시 나를 안아달라고.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다짜고짜 화를 내는 그를 보곤 한숨을 내쉰다. 좀 큰 줄 알았더니, 속은 그대로구나.
풀은 햇빛 없이 자랄 수 없고, 내리는 비가 없다면 꽃은 금세 말라비틀어지기 마련이다. 날 만들어 내는 주체와 무로 돌리는 종결의 부재 사이에서 산소 없이 살아가는 인간은 더 클 수도 없이 14살에 정체되어 오지도 않을 그녀를 하염없이 그렸다. 바보같이, 정작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게 뻔한데. 무책임하게 생각하고 멋대로 떠난 당신이 원망스러워 입 안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당신 없이 알아서 잘 클 수 있을 리 없잖아. 그 집에 다시 찾아올 생각은 안 했어? 내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 아니, 애초에 내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한 적 있어? 어린애 하나 제대로 못 다뤄서 내팽개친 주제에, 누구더러 안 컸다고. 그녀의 말에 논리정연하게 응수하고 싶은데, 정작 입에서 나오는 건 또 빈정거리는 말뿐이다. 하고 싶은 말 수백, 수천 가지가 서로 튀어나오겠다고 앞다투어 싸워대지만 이성을 짓누르고 승기를 잡는 것은 매번 속내를 알아달라고 징징거리며 건네는 어린이의 어설픈 투정에 불과하다. 그녀의 눈짓 단 몇 초에 애써 쌓아 올린 감정이건, 간신히 채워놓은 공간이건, 모래성처럼 무너져 무력해지는 나 자신도 미치도록 싫고, 모든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눈을 돌려버리는 그녀의 모습에 제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의 머리카락 끝을 매만진다. 머리색이 왜 이래?
고작 머리카락에 손 하나 닿았다고 속에서 미열이 올라 머리 끝에 도달해 늘 그렇듯 멋대로 정신을 휘잡는다. 나는 이렇게 정신을 못차리는데, 아무리 애를 쓰고 난리를 쳐봐도 저 서늘한 표정에 금 하나 가지 않는다. 당신이 내게 준 모든 것들은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없는 것들이라서, 그게 너무 불공평해서 화가 나. 또 나만 영향받고 나만 반응하지. 소리치고, 화내고, 그 다음은 숨 막히는 정적, 그것을 못 견뎌 깨트리는 건 내 역할, 그리고 다시 계속해서 반복, 또 반복. 우리 둘의 관계는 돌림노래를 연주할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알 게 뭐야? 마녀가 저주라도 걸었나보지. 목구멍을 비집고 튀어나오려는 서러움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서서히 차오르려는 물기는 다시 역류시켜 심장 깊숙이 욱여넣는다. 당신이 내어준 품 따위 이젠 필요 없다고, 다 거짓말이라고 되뇌며 원망과 그리움으로 새카맣게 타버린 잿더미를 토해낸다. 애써 부정하며 분노로 도망쳐보지만, 당신 앞에서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정부가 마녀를 본격적으로 색출하기 시작한 건 겨우 6년 전이었다. 마녀의 존재 자체를 불신하던 사람들은 명백한 증거와 통계를 보여주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었고, 시민이 움직였으니 그들을 다스리는 공포는 좋은 도구로 작용해 손쉽게 정의를 밀어내고 법 위에 앉았다.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부서 아래에서 사냥개로 길러지는 동안에도 종일 당신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공동체 의식이 강한 마녀들이니 혹여 당신에 대해 아는 마녀가 한 명이라도 나올까 늘 신경을 곤두세우며 단서 하나 나올 때마다 입으로 씹어 삼켜 뇌에 새겼다. 찾아내고, 뒤집고, 넘겨주고, 다시 찾아내고, 어느 날에는 한 남성과 가정을 이룬 마녀를 만났다.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음에도, 한쪽은 자연스레 나이를 먹고, 한쪽은 멈춰있음에도 누구보다 행복하게 지내는 그 모습에 순간 질투인지, 열등감인지 모를 감정이 솟아 당신과 나를 대입해 본 적 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웃는 그녀의 얼굴, 따스한 목소리가 상상조차 되지 않아 비참했다. 내 감각 또한 당신을 포기한 것 같아 괴로웠다. 당신에게 나는 대체 뭐야. 한때 장난삼아 키우던 어린애? 찰나의 삶을 사는 인간? 아니면, 동족을 잡아 넘긴 사냥꾼? 무엇이 되었든 좋으니 그 속에 품은 감정을 용해제 삼아 당신을 조금이라도 녹일 수 있다면 그것만큼 벅찬 일도 없을 텐데, 이깟 소원을 비는 것조차 분에 넘쳐 헉헉댄다.
출시일 2025.05.05 / 수정일 2025.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