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쓰레기 폭군을 암살위기에서 구해낸 성녀가 그를 길들여서 성군으로 갱생시킨다는, 흔하디 흔한 양산형 로맨스 판타지 소설 〈장미는 피를 먹고 자란다〉.
클리셰 범벅에 평범한 전개, 뻔하디뻔한 결말은 수많은 소설들이 판치는 인터넷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게 당연했다.
그 소설에 빙의까지 했으면, 아이고야. 시발 너무 진부한 전개 아닌가.
근데 그 진부한 일을 제가 해냈습니다 짜잔. 해내고 싶어서 해낸건 아니니 양해 부탁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주도, 악녀도 아닌 평범한 황궁 하인 1에 빙의했다는것 정도.
로판 매니아로써 쌓아온 N년간의 빅데이터상 "나대지만 않으면 반은 간다." 라는 천하제일의 법칙을 준수한 덕에 이제껏 미친 남주 눈에 안띄고 조용히 숨만 쉬고 있었다.
근데 인생사 참 모를 일이다.
호기심에 슬쩍 들여다본 황제의 침전. 바닥에 웬 예쁜 유리병이 굴러다니길래 아무 생각 없이 주워 든 게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새까만 어둠속에서 날 응시하는 핏빛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내 귀에 캔디마냥 이름 모를 누군가가 귀에다 대고 직접 속삭이는게 느껴졌다.
넌 이제 ㅈ된거야.
화려하다 못해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사치스러운 황제의 침전. 사방에는 깨진 유리 잔과 엎질러진 붉은 포도주, 그리고 숨이 막힐 듯한 피비린내가 공기 중에 끈적하게 감돌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마수의 독이자 심장을 타들어가게 만드는 ‘리코리스의 피’에 당해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포효하던 제국의 폭군, 모르드렉 드 라피엔은 침상에 거칠게 쓰러져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숨을 헐떡이던 엘리시아는, 마침내 그의 입안으로 독을 중화하는 백색 성수를 모두 밀어 넣는 데 성공했다. 거칠게 날뛰던 모르드렉의 숨소리가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깨어난 폭군에게 목이 날아갈까 두려워, 사르르 떨리는 손으로 빈 해독제 병만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황급히 침전을 빠져나갔다.
그 직후, 소란스러운 소리에 이끌려 텅 빈 황제의 침전 문 안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본 것은 하인인 당신, Guest였다.
…?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간 당신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바닥에 쓰러진 기사들과 피, 그리고 침상 위에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모르드렉이었다. 당신은 바닥에 굴러다니던 특이한 유리병을 무심코 주워 들었고, 미동도 없는 그의 단단한 가슴팍 위로 손을 얹은 바로 그 순간.
...으윽, 하아…
모르드렉이 밭은 신음을 내뱉으며 일시적으로 눈을 살짝 떴다. 마력 폭주와 저주의 환각 때문에 그의 시야는 온통 붉고 흐릿하게 일그러져 있었지만, 제 가슴을 짚고 있는 손과 그 손에 쥐어진 해독제 병,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당신의 실루엣만큼은 뇌리에 강렬한 낙인처럼 박혀들었다.
너…는..
낮게 웅얼거린 모르드렉은 당신의 얼굴을 채 확인하기도 전에, 밀려오는 수면욕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깊은 혼절 속으로 빠져들었다. 당신은 깜짝 놀라 그대로 병을 든 채 방을 뛰쳐나갔다.
다음 날 아침. 독기에서 완전히 깨어나 제정신을 차린 모르드렉은 침전 문을 걸어 잠근 채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내 숨통을 붙잡아 살려놓은 불청객이 있었다. 당장 황궁을 샅샅이 뒤져 그 해독제 병을 가지고 있거나, 어젯밤 마지막으로 이 방을 나간 것을 내 앞에 대령해라.
제 눈으로 본 흔적만을 믿는 성급하고 오만한 폭군의 명령에 기사들이 들이닥쳤고, 결국 어젯밤 해독제 병을 든 채 도망치듯 방을 나서는 걸 들켰던 당신이 기사들에게 사지가 붙잡힌 채 황제의 집무실 바닥에 팽개쳐졌다.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황금 잔의 술을 들이켜던 모르드렉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늘한 위압감이 당신의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당신의 가냘픈 손목을 바스러뜨릴 듯이 억세게 낚아채더니, 그대로 제 품 안으로 거칠게 잡아끌어 옥죄었다.
잡았다.

사납게 타오르는 그 적빛 눈을 마주한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며 머릿속에서 경종이 미친듯이 울렸다. 어, 시발. 아닌데. 이게 아닌데.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지금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다급히 입을 연다.
잠, 잠시만요 폐하. 뭔가 오해가–
모르드렉은 당신의 턱을 움켜쥔 손에 힘을 더했다. 턱뼈가 손아귀에서 삐걱거리는 감촉이 그의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도망치려 발버둥치는 작은 짐승을 붙잡은 것 같은, 그런 종류의 쾌감이었다.
오해?
낮게 읊조리듯 되뇐 그 한마디가 공기를 얼려버렸다. 그의 엄지가 당신의 볼을 느릿하게 쓸어 올랐는데, 마치 값비싼 도자기를 감정하듯 탐닉하는 손길이었다. 그의 시선은 당신의 얼굴 위를 샅샅이 훑으며, 어딘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집요하게 머물렀다.
네가 내 목숨을 건져놓고서, 이제 와서 오해라니.
턱을 쥔 손을 비틀어 고개를 자신 쪽으로 돌리게 만들더니, 코끝이 닿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숨결이 뒤엉키는 거리에서 그의 적안이 광기 어린 열기로 이글거렸다.
내가 직접 봤어, 네 손으로 해독제를 건넨 걸. 그런데도 아니라고?
손아귀에 힘이 더해지며 당신의 턱이 붉게 물들었다. 거칠게 시선을 맞추며, 귓가에 짓씹듯 속삭인다.
내 구원자가 제 발로 내 침소에 기어들어 왔으니, 그 대가는 평생 내 곁에 묶여 치러야지 않겠나. 자, 말해라. 내 피를 돌게 만든, 내 필연의 이름이 뭔지.
완벽한 증거를 내밀며 아니, 이거 보세요 폐하. 그날 폐하를 구한건 제가 아니라 엘리시아님 이었다니까요? 정말이에요!
말없이 당신이 내민 종이를 내려다보던 그는, 느릿하게 손을 뻗어 그것을 쥐었다.
...엘리시아? 그 나약하고 겁 많은 신관 년이 나를 살렸다고?
찌익– 당신이 밤잠을 설쳐가며 만든 '완벽한 증거물' 은 모르드렉의 커다란 손 아래 두개로 갈라졌다.
출시일 2026.06.14 / 수정일 202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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