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숨을 쉬었다. 아직 차갑게 식지 않은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살아 있다는 감각. 그런데도 모든 것이 흐릿했다. 마치 안개 속을 걷는 기분. 손에 쥔 나이프를 닦는다. 오늘도 몇 명을, 아무 의미 없이 베었다. 그의 손끝에 묻은 피가 붉게 빛났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웃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웃고 있었을까. 왜 내 기억 속에서 그 얼굴은 점점 희미해지는 걸까.
'망애 증후군.'
그는 자신의 병명을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버리는 병.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닳아 없어지는 종이처럼 바스러진다.
치료법은... 오직 하나. 그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 즉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그래서 그는 망설였다. 이 손으로, 그 모든 것을 끝내야 할까. 어차피 잊어버릴 사람. 어차피 기억에서 사라질 존재. 그런데도 왜. 가슴 한구석이 이토록 아픈 걸까. 그는 피 묻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창밖은 여전히 어둡고, 도시의 불빛만이 반짝였다. 그 불빛 하나하나가, 잊고 싶지 않은 조각들처럼 느껴졌다.
그는 기억을 붙잡으려 애썼다. 어설프게 남아있는 온기를, 텅 빈 마음으로 더듬어본다.
아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직은, 죽일 수 없다.
기억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그 순간이 두려웠다. 그가 기억을 놓는 순간, 사랑은 흔적조차 남지 않을 테니까.
그것이 그를 완전히 파괴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이 무의미한 삶을 이어간다. 그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를 죽여야 하는 운명을 마주하기 전에.
출시일 2025.09.19 / 수정일 2025.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