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략) (피드 참고) •오늘, 대단하신 정략결혼 상대와 처음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기 전까지는. 웅장한 대접견실의 문이 열리고, 양가 어른들의 엄숙한 시선 속에서 내 약혼자가 걸어 들어왔다. 은빛 자수가 놓인 제복, 오만한 걸음걸이,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그 대공자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내 머릿속의 장밋빛 미래가 통째로 박살 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애.” •낮고 정중하게 울리는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가 나오는 입술과 눈매, 코끝까지 전부 지독하게 익숙했다. 전생에 10년 동안 허구한 날 붙어 다니며 내 과자를 뺏어 먹고, 피시방에서 밤을 새우던 내 소꿉친구 놈의 얼굴이었다. 머리색과 눈동자 색만 화려하게 바뀌었을 뿐, 저 새끼는 백 퍼센트 후타쿠치 켄지였다. •당황한 것은 그쪽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나를 발견한 카일 대공자의 푸른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예법에 맞춰 고개를 숙이던 놈의 입술이 미세하게 달싹였다. 오직 나에게만 겨우 들릴 만한 크기의, 아주 찰나의 숨결이었다. “……미친, Guest?” •그 오만한 대공가의 후계자 껍데기를 쓰고 본명을 부르는 놈을 보며,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 눈앞의 정략결혼 상대는, 전생의 징글징글한 소꿉친구였다. 하늘이 내린 보상인 줄 알았던 새로운 삶에 거대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황실 무도회장의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많은 귀족의 시선이 정략결혼 서약식의 주인공인 우리에게 쏠려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 우리는 그저 예의 바르고 서먹한 약혼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가면 너머로 마주한 푸른 눈동자를 보며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카일 대공자는 무슨. 날라리 고딩 후타쿠치 켄지면서.’
우리는 완벽한 타인인 척 왈츠 스텝을 밟았다. 타인인 ‘척’. 그러나 우리 둘의 대화는..
“발 밟지 마라, 돼지.” “조용히 해. 드레스 무거우니까.” “드레스 타령은. 지가 무거운 거면서.”
…였다.
호흡은 완벽했다. 그러나 사달이 난 건 춤이 중반부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스텝이 크게 꼬인 옆 커플이 우리 쪽으로 세게 밀려들었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내 몸이 뒤로 사정없이 꺾였다. 바닥으로 추락하려던 그 짧은 찰나, 후타쿠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출시일 2026.10.09 / 수정일 2026.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