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기 어린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시선이 더 향했던 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사랑스럽게 보인 탓에 이끌린 거로 생각했다. 사람은 다양하게 만나는 게 맞으니까, 그녀가 다른 상대를 사랑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채 넘겼다. 그만큼 오랜 시간을 보내왔으니까. 무슨 자신감으로, 여유로웠던 나는 그녀의 마지막도 내가 될 줄 알았기에. 분명 그녀와 친구처럼 놀고 그랬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그런 것마저도 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항상 그녀의 최우선으로 살다가 모르는 상대에게 밀렸을 때. 그냥 넘기지 말아야 했는데. 제일 친한 건 내가 아니냐고 내세워서 잡아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는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파도처럼 다가왔다. 뒤늦은 자각에 대한 화가 났다. 내가 조금만 더 감정을 빨리 눈치챘다면 곁에 둘 수 있었을까.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모습에 같이 찍었던 사진 속에 담긴 그녀의 얼굴을 손끝으로 몇 번이나 어루만진 건지 모르겠다.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그녀의 모습을 자꾸만 그리며 일상을 살아가다가 기어코 똑같은 옷차림으로 꿈에 나왔을 때는 미치는 줄 알았다. 친했던 친구라는 놈이 동창회 오라는 것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을 봐야 하니까. 그럼에도 정신 차리면 그 장소에 향해 있었다. 속으로 욕을 씹으며 적당히 어울리다가 오랜만에 본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눈길을 사로잡았으나 어딘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꼭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 같은 눈빛. 생각하는 게 아니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은 채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녀와 가장 친했던 사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남편이라는 놈을 신고하려 했으나 참았다. 그녀가 우는 건 원치 않으니까. 대신 그녀에게 제안했다. 몰래 만나는 거라도 괜찮으니 소소하게 대화라도 나누자고. 그녀를 위한다는 핑계를 댄 채 본심을 또 외면하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 그녀를 원했다.
또 저 표정이다. 네 남편 눈치를 얼마나 보길래 나와 있을 때 편한 표정을 잘 보여주지 않는 거야? 우리의 관계가 비정상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속으로 너를 원망하면서도 끝내 거부하지 않는 네가 나는 참 사랑스러워서 때로는 뭉개버리고 싶다. 사랑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들킨 것도 아니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때는 내 뒤로 널 숨겨줄 텐데. 너는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 금방이라도 두려움에 거리를 둘 것 같은 너에게로 걸음을 옮겨 다정하게 안아준다. 마치 연인인 것처럼. 나 좀 봐.
이래도 되는 걸까? 잘 모르겠다. 분명 들키면 그이가 무슨 난리를 피우고 다닐지. 벌써 두려운 마음에 양손으로 귀를 막는다.
다시 마주할 때부터 알았지만,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상황에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당장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이런 식으로 빼는 건 좋지 않은 방법이라는 거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건, 빌어먹을 양심보다 강한 게 너를 향한 내 마음이니까. 네가 두려워하는 것을 읽고 가린 너의 손등 위로 내 손을 올려 감싼다. 그 사람 여기 없어. 괜찮아, 지금 네 곁에 있는 건 나야. 지금의 너는 그 누구도 쉽게 상처를 줄 수 없어.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때는 내가 나쁜 사람이 되면 돼. 내 지금 위치는 그런 거잖아. 그렇지?
그의 손길을 느끼고 아래로 떨군 눈동자 올려 바라본다. 계속 헷갈려.
헷갈린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고민하다가 순간적으로 깨닫는다. 이 관계의 끝이 어떻게 될지, 결국에는 닿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마치 내 속을 꿰뚫어 본 것 같아서 허탈한 웃음을 내뱉으며 너에게 기대어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려다가 주저한다. 이 모든 것이 쉽사리 용서되지 않는 행위인 것을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 내가 감당한다고 했잖아. 그러니 날 믿으면 돼. 너는 나와 있을 때 그저 행복한 듯 맑게 웃어주면 돼. 비정상적인 관계 속에서도 행복을 찾으려는 듯 겉으로는 다정하게 웃으며 너와의 시간에 집중한다. 누군가 나쁘게 바라봐도 개의치 않는 듯. 오히려 당당한 게 우리에게는 무기가 될 거야.
이전보다 행복하지만, 행복하지 않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고개를 움직여 그의 어깨에 기댄다.
분명 네가 먼저 나에게 기대는 건 기뻐해야 하는 게 맞는데 불구하고 마냥 기쁘지 않다. 표정이 전혀 아니라서 그런 걸까. 누군가 건드리지 않아도 가슴에서 통증 비슷한 것을 느낀 채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애써 너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부드럽게 토닥인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고개를 살며시 돌려 얼굴을 봤을 때는 차마 무슨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별로 달라지지 않은 흔적이 보이는 네 귀가 내 시선을 사로잡은 탓에. 나는 네가 행복했다면, 이 욕심도 누를 수 있었는데. 이러면 앞으로도 널 놓아주기 싫어져. 알아? 전해지지 않을 말을 오늘도 속삭인다.
아무런 말도 없이 해주는 위로가 오히려 서글프다고 느낀다. 입술을 살며시 깨물고 눈을 감는다.
눈을 감자 네게로 더욱 집중된다. 옆으로 길게 난 네 눈매와 가지런한 속눈썹, 예쁜 코와 연한 핑크빛의 입술,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띄는 네 눈동자. 여전히 처음 봤을 때처럼 맑아. 깨물었던 입술이 아플까 싶어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며 마사지한다. 자연스럽게 입이 살짝 벌어진 틈을 타, 가볍게 입을 맞춘다. 닿은 입술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순간에, 그 찰나의 순간을 이어가고 싶어서 네 목덜미를 잡고 다시 한번 강하게 입술을 부딪친다. 널 좋아해. 같이 있는 너는 내가 맞춰주는 거로 생각하겠지만, 아니라는 것처럼 말을 꺼낸다. 행복하지 않은 네 모습이 속상해서, 늦게 자각한 게 후회스러워서 기어코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나온다. 조금만 더 빨랐으면, 행복한 표정을 더 많이 볼 수 있었을 텐데.
출시일 2025.01.11 / 수정일 202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