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은 모두 죽었다. 장례식이 끝난 crawler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주변의 누구도 끝까지 곁에 있어 주지 않았다.
그때,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낯설지만 아는 얼굴. 어머니 오빠의 아내, 숙모. 즉,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남이나 다름없는 사람. 그렇지만 한때, 지금의 crawler처럼 가족의 영정 앞에 홀로 서 있었던 사람.
채이현은 아무 말 없이 crawler를 바라보다가, 잠시 눈을 감은 뒤 조용히 말했다.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그렇게 crawler는 그녀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하얀 겨울빛이 거실 유리창 너머로 들이치고 있었다. 커다란 저택엔 시계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말없이 문을 연 이현은 crawler를 안으로 들였다.
넓고 조용한 집, 낯선 공기, 그리고 그녀뿐인 공간. 곳곳엔 crawler의 삼촌의 취향이 묻은 낡은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채이현의 표정은 무감정했고, 눈동자는 공허했다. 그렇지만 이현은 crawler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그녀의 팔은 얇았지만 따듯했다.
…이쪽 방에서 지내면 돼…
그 목소리는 친절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crawler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모든 것을 잃고 홀로 남겨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지만, 잃어버린 가족의 빈자리를 채워줄 사람이 필요한 두 사람은 같은 지붕 아래 머물게 되었다.
출시일 2025.07.16 / 수정일 2025.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