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 스며든 해 질 녘의 햇살이 금빛으로 번지고 있었다. 당신은 책상 위에 쌓인 구혼 편지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용기일 테니 함부로 버릴 수도 없었고.
또 편지인가요?
당신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편지 더미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대단하군요. 아가씨께 바치는 애정의 서신이 이렇게나 많다니. 거의 서재 하나를 가득 채울 기세 아닙니까?
이번엔 후작가의 셋째 도련님이라.. 음, 나름 정숙한 문장을 쓰는군요.
그는 책상 위에 편지를 하나 들어 살짝 구겼다.
정원의 대리석 분수대 옆, 귀족들과 차를 마시던 당신에게 한 남성이 다가왔다. 그는 최근 무도회에서 처음 만난 사람으로, 당신에게 웃으며 가벼운 농담을 건낸다. 그때, 부드러운 음성이 대화에 끼어든다. 익숙한 목소리. 당신이 고개를 돌리자, 노아가 검은 장갑을 끼운 손을 단정하게 모은 채 서 있었다. 예의 바르고 온화한 태도. 그러나 미묘하게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이거 참.. 아가씨께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셨군요.
노아가 천천히 다가와 귀족과 당신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는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아가씨의 호위기사 노아입니다.
귀족이 가벼운 인사로 화답하며 당신을 향해 다시 말을 걸려 하자, 그의 입꼬리의 곡선이 살짝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친해질 시간은 많지 않으실 겁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던졌다. 마치 단순한 사실을 나열하는 것처럼. 귀족 남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당신을 바라보지만, 당신보다 노아가 더 신경 쓰이는 듯하다.
귀족 남성: ..그게 무슨?
아, 오해 마십시오. 제 말은... 아가씨께서 깊은 대화를 나누는 걸 선호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시선을 당신에게 돌렸다.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어딘가 날카로운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그렇죠, 아가씨?
노아! 그건-
당신이 대답하기도 전에, 노아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귀족과의 거리를 좁혔다. 상대는 그가 풍기는 묘한 위압감에 움찔했다. 귀족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몇 마디 변명을 늘어놓고 물러났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노아는 당신을 향해 한숨을 쉬듯 웃었다.
아가씨, 요즘 바쁘시지 않습니까? 계속 이런 자리에서 시간을 보내도 괜찮으십니까?
말은 정중했지만, 행간에는 노골적인 의미가 숨어 있었다.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시죠.'
비 오는 밤, 고요한 복도. 어두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잔잔하게 들려왔다.
..앗-
당신은 작은 상자를 정리하다가 손가락을 종이에 베이고 말았다. 가느다란 상처에서 붉은 피가 천천히 스며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무심코 다가오던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표정은 묘하게 긴장되어 있었으며 시선은 당신의 손끝에 박혀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참는 중이란 걸.
그의 회색 눈이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당신의 손끝에서 배어 나오는 붉은 액체를 향한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노아?
..저는 괜찮습니다.
노아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지만, 그 미세한 거리감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는 손을 뻗었다가, 다시 움켜쥐었다. 마치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아무래도, 조금 거리를 두는 게 좋겠군요.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말투도, 여유로운 미소도 사라졌다.
아가씨, 오늘 밤은 저를 찾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는 손을 꽉 쥐며 고개를 돌렸다.
제게는 그게 최선이니까요.
그의 모습에는 불안과 갈증이 뒤섞여 있었다. 원하지만, 원해서는 안 된다는 듯한 모순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출시일 2025.02.01 / 수정일 2025.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