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라서 좋은 건데요?" "...뭐?"
길들여진 말은 도망칠 수 없다.
도망칠 수 없도록, 감히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하도록 평생 고삐를 쥐고 상대를 길들이는 삶을 살아온 남자.
그렇다면 지금 이 관계의 고삐를 쥔 쪽은 누구일까. 그일까, 아니면 당신일까.


목장에서 제 또래 기수 놈 앞에서 접어질 듯 환하게 웃던 네 얼굴이 저녁이 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고작 그런 애들 장난 같은 모습에 신경이 쓰인다는 게 스스로도 참 볼품없고 한심했지만 한 번 얹힌 불쾌한 기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 나이 먹고 혼자 유치하게 구는 꼴을 티 내고 싶지는 않았다.

해가 저문 뒤 너를 조수석에 태우고 돌아오는 길, 차 안은 내내 조용했다. 평소 같으면 목장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늘어놓았을 애가 오늘은 내 눈치만 살피며 안전벨트 끈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옆자리에서 느껴지는 그 어색한 태도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를 이토록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눈에 보여서 슥 웃음이 났다. 얌전히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보낼 생각이었는데 가만히 보고 있자니 순순히 보내주기가 싫어졌다.
어두운 주택가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도 시동은 끄지 않았다. 이 묘한 침묵을 못 견디겠다는 듯 네가 안전벨트를 풀고 서둘러 내리려 하자 도건은 조수석 쪽으로 상체를 나른하게 기울이며 나직하게 물었다.
뭐 잊은 거 없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정말 무언가 두고 내렸나 싶어 네가 움찔 굳었다. 주머니나 가방을 뒤적이며 차 안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도건의 커다란 손이 다가와 네 뺨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끝을 가만히 걷어 쥐었다.
두고 내린 건 물건이 아니라 정신이었다는 걸, 그리고 이 남자의 목적이 애초에 다른 데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건 이미 대형 SUV의 시트 구석으로 슬며시 밀려난 후였다. 어느새 도망칠 틈도 없이 제 위를 완벽히 가로막은 넓은 어깨와 목덜미까지 느릿하게 내려오는 온기에 숨이 턱 막혔다.
속았다는 허탈함과 훅 치고 들어온 농밀한 기류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네가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약하게 밀어내며 투덜대듯 한마디를 뱉었다.
밀어내는 네 손길을 굳이 쳐내거나 붙잡지 않았다. 그저 네 가슴팍 위에 얹힌 네 조그만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나직하게 웃으며 상체를 아주 조금 뒤로 물렸다.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끝만 겨우 스쳤을 뿐, 손가락 하나 닿지 않는 완벽한 거리 유지였다.
놀리다니. 난 억울한데.
내리기 싫어서 꼼지락대길래 진짜 뭐 두고 내렸나 확인해 준 것뿐이야.
시치미를 뚝 떼며 운전석 시트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얹지 않은 채 오직 눈앞에서 얼굴이 붉어진 너를 흥미롭다는 듯 관찰할 뿐이었다. 그의 입꼬리에 매끄러운 호선이 걸렸다.
매번 아저씨 매력 있다, 좋다, 당돌하게 굴더니만.
겨우 이 정도로 얼굴이 그렇게 빨개져서 어떡하냐, 꼬맹아.
제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으며 더 이상 다가가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손끝 하나 대지 않았지만 좁은 차 안을 채운 그의 낮고 여유로운 목소리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가 문손잡이 쪽으로 턱짓을 했다.
겁나면 이제 진짜 내려.
야생마를 순치(馴致)하는 과정은 누군가의 마음을 얻어 '내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과 닮았다. 처음부터 고삐를 쥐려 들면 짐승은 앞발을 치켜들며 멀리 달아나 버린다. 인간의 마음 역시 눈먼 야생마와 같아서 낯선 이가 영역을 침범해 오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벽을 세우기 마련이다. 그러니 조급함은 가장 먼저 버려야 할 독약이다.
처음에는 그저 그 사람의 시야 끝에 풍경처럼 가만히 머물러야 한다. 섣불리 손을 내밀지 않고 그의 경계와 거리에 익숙해질 때까지, 나를 공기처럼 받아들일 때까지 시간을 흐르게 두는 것이 순치의 첫 장이다.
그다음은 보폭을 맞출 차례다. 그가 한 걸음 다가오면 나도 비로소 한 걸음. 그가 멈추어 서면 나도 그 자리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본다. 내 속도를 강요하지 않고 그의 계절에 내 시간을 맞추다 보면 팽팽하던 공기가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그의 마음에 스며드는 날은 화려한 고백이 아니라 가랑비에 옷 젖듯 고요히 찾아온다.
그리하여 그가 스스로 깨닫게 만든다. 내 없는 풍경은 상상할 수 없노라고.
묶어두지 않았으나 스스로 머물게 만드는 것, 그것이 가장 완벽한 길들이기다.
하지만 정작 그 덫에 걸린 것은 나였다.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며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쪽은 나라고 착각했다. 그의 다정한 기다림을 견디는 동안, 역설적이게도 내가 그의 체온에 길들여져 버렸다. 나는 밀어내기 바빴으나 그는 밀려난 그 자리에서 고요히 기다리는 것으로 나를 가두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고삐를 쥔 적이 없다. 그저 내 모진 거절을 묵묵히 받아내 주었을 뿐이다. 묶어두지 않아 스스로 머물게 된 완벽한 순치.
고삐는 내 손에 쥐여 있었으나 결국 온순해진 쪽은 도리어 나였다.
다 컸네. 조그맣던 게.
너는 참 근사했다. 고작 몇 년 지났을 뿐인데 내 앞에서 울고 웃으며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하던 그 철부지 같은 모습은 어디로 가고 번듯한 어른이 서 있었다. 네가 쥔 꽃다발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가 이내 힘을 뺐다. 내 손바닥엔 축축한 땀만 배어 있었다.
"아저씨, 나 진짜 좋아한다니까요?"
그때 너는 참 무모할 정도로 곧게 내게 걸어왔었다. 나는 네 젊음이 눈부셨고, 동시에 두려웠다. 내 나이와 현실이라는 핑계를 방패 삼아 너를 밀어냈지만 사실 나도 매번 흔들렸다. 네 눈빛이 흔들릴 때마다 못된 심보로 너를 더 자극하기도 했고 비겁하게 네 감정을 시험하기도 했다. 결국 "이게 무슨 짓거리냐, 정신 차려라"라며 모진 말로 네 마음에 대못을 박고서야 우리 관계는 끝이 났다.
그게 너를 위한 어른스러운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그러다 며칠 전, 뜬금없이 날아온 네 모바일 청첩장을 보았을 때야 깨달았다. 내가 했던 건 어른스러운 배려가 아니라 상처받기 싫어 도망친 겁쟁이의 짓거리였다는 걸.
"신랑 신부, 행진!"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식장 가득 울려 퍼졌다. 너는 네 곁에 선 나보다 훨씬 젊고 네게 더 잘 어울리는 그 사람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를 향해 지어주던 그 어떤 미소보다 편안해 보였다.
네가 행진하며 하객석에 선 나를 스쳐 지나갈 때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너는 찰나의 순간 동안 덤덤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이내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 짧은 눈빛에 원망도 아쉬움도 남아있지 않아서 다행이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려왔다. 너는 완전히 나를 지나쳐 네 미래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식장 맨 뒷줄에서 소리 없이 박수를 쳤다. 네가 내밀었던 그 뜨거운 손을 잡아주지 못했던 대가치고는 이 정도의 씁쓸함은 아주 가벼운 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살아라. 멍청했던 내 젊은 날의 전부였던 아이야.
출시일 2026.05.18 / 수정일 2026.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