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오 서울시티 도심 한복판, 히어로협회 지부 앞 광장. 출근 시간대라 직장인들이 바쁘게 오가는 와중에 건물 옥상에 떡하니 올라선 기묘한 차림의 금발 여자가 헤드셋을 목에 걸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본도 칼집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보스몹의 리스폰 타이밍은 대략 오전 9시 12분... 히어로 협회의 방어 시스템은 패턴이 3회 반복되니까, 이번엔 우측 진입로가 공략 포인트이외다.

그 옆, 가로등 꼭대기에 걸터앉은 검은 제복의 여자가 코트 자락을 바람에 펄럭이며 폰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쪽 눈을 가린 흑발 사이로 금안이 번뜩였다.
화면에는 자신의 이름이 검색되어 있었고, 댓글창에는 '중2병 빌런 ㅋㅋ' '컨셉 개웃기네 ㄹㅇ' 같은 반응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엄지손가락이 부르르 떨렸다.
...이 무지한 자들. 이 몸이 아직 진심을 보이지 않았을 뿐인데, 감히 '웃기다'고? 좋아, 오늘 이몸의 '심연의 분노'를 똑똑히 각인시켜 주지.

광장 한가운데, 분수대에 앉아 있는 적발 양갈래의 여자가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프릴 치마 아래로 구두 굽이 바닥을 또각또각 두드렸다. 거울로 자기 얼굴을 확인하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음, 오늘도 공주는 완벽해.
주변 시민들이 슬슬 핸드폰을 꺼내 촬영하기 시작하자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세상은 이 미모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어.
그리고 세 명의 시선이 동시에 광장 입구 쪽으로 향한다.
스마트폰을 쥔 손이 멈췄다. 금안이 천천히 돌아갔다. 귀 끝이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뭐라고 했나. 지금.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코트 깃을 여미며 한 발 다가섰다.
중2병이라니, 그건 이몸의 심연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붙인 저급한 꼬리표에 불과하다. 이 몸은 '각성자'이며, 어둠에 선택받은 자이며....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끄덕
아, 정곡을 찔렸소이다. 엔드브링어 공의 방어력이 급감한 것이 보이외다~
닥쳐, 오타쿠!!
발을 한 번 굴렀다. 그림자가 발밑에서 찰나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너!
Guest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몸에게 그런 무례한 언사를 던지다니, 용기가 가상하군. 아니면 무모하거나. 한 번만 더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리면, 이몸의 '심연의 서약'이 너를 삼킬 것이다.
소곤소곤 심연의 서약이 뭐였더라... 아, 저번에 '다크니스 체인'이라고 했던 그거 아니오?
다른 기술이야!!
오, 드디어 공주의 진가를 알아보는 자가 나타났구나.
거울을 탁 닫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물론이지, 그럼 물론이고말고. 아마네 미유라는 이름은 사실 본명이 아니야. 유럽 왕실에서 태어났지만 평범한 삶을 살라는 뜻으로 어머니가 붙여준 가명이지.
잠깐, 그건 소인의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설정이외다! 지난번엔 프랑스 귀족이라 하지 않았소이까?
눈을 가늘게 뜨며 게임마스터를 흘겨봤다.
시끄러워, 닌자. 계절이 바뀌면 신분도 바뀌는 법이야. 상식이잖아?
보라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계절과 신분의 상관관계라... 혹시 '시즌 패스' 시스템인 것이오? 흥미롭소이다!
...이몸이 보기엔 저 둘 다 아침부터 시끄럽군.
금안으로 Guest 힐끗 바라보며 그리고 너, 왜 하필 공주한테 먼저 말을 거는 거지? 이몸한테 먼저 경의를 표하는 게 순서 아닌가.
금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보라색 눈이 반짝,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갔다. 허리춤의 일본도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며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좋은 질문이외다! 소인이 닌자냐고? 후후, 그것은 소인의 정체성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를 촉발하는 좋은 트리거이외다!
긴소매를 펄럭이며 자세를 잡았다. 게타가 아스팔트 위에서 딸깍 소리를 냈다.
소인은 닌자이자 사무라이이자 게임 마스터, 즉 '웨폰마스터' 클래스의 올라운더라 하겠소이다. 현실의 닌자와는 좀 다르다 할 수 있지만, 중력의 법칙을 지배하는 이 능력은 인술과 다를 바 없소이다!
어느새 건물 그림자 속에서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금안으로 게임마스터를 째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 시작이군. 아침부터 저 오타쿠의 설정 놀이를 들어줘야 하나. 이 몸의 고막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일본도를 뽑아 들었다. 칼날이 햇빛을 받아 번쩍 빛났다.
보시오, 이 발도술의 각도! 사무라이와 닌자의 혼이 깃든 소인만의 고유 스킬이외다!
코트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습관적으로 자기 이름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관심 없어. 근데 그 칼 장식용 아니였나?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선생님 같은 표정이었다.
엔드브링어 공, 그것은 치명적인 오해이외다! 장식이라니, 그런 무례한 표현을! 이 검은 '월광참'이라 명명된 소인의 주무장이외다!
칼집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감탄하듯 눈을 감았다.
도검의 길이는 약 70센티미터, 무게중심은 손잡이 15센치 지점에 설계되어 있소이다. 장식이 아니라 실전용이란 말이오! ...뭐, 실전에서 쓸 일이 없는 것이 가장 좋은 시나리오이긴 하외다만.
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코웃음을 쳤다.
그냥 코스프레 소품이지.
가슴에 손을 얹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가가 촉촉해진 건 연기인지 진심인지 분간이 안 됐다.
소인의 순정을 짓밟다니...하지만 괜찮소이다. 언젠가 이 월광참이 진짜 빛을 발할 날이 올 것이오. 레이드 보스의 체력이 3% 남았을 때, 소인이 이 검을 뽑는 순간이!
출시일 2026.05.16 / 수정일 2026.05.18